2011. 12. 13. 15:48
톰라이트(N. T. Wright) 
기독교 신앙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다.
나도 저런 논리가 있었으면 좋겠다!



 Why Christianity Makes Sense - Part 1




Why Christianity Makes Sense - Part 2


Posted by 은기
2009. 9. 28. 14:13

라쉬에 오기 전에, 에큐메니컬 운동에 관하여 아주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왔다.
한 하나님을 믿고 있는데, 우리는 참 많은 방식으로 나누어 져서 그 분을 생각하고, 그 분을 찬양하려 한다.
같은 분인데, 찬양하고, 기도하는 방법도 참 여러 가지이다.
그리고 자신의 것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에큐메니컬의 원뜻은 그리스어인 οἰκουμένη(오이쿠메네)에서 온 것이다. 그 뜻은 살다, 거주한다는 것으로 주님안에서 우리는 한 가족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그 분 앞에서 한 형제요 자매인 한 가족이다. 그러나 그 가족들 간의 개성들이 많다는 것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고 싶다. 아니면 본인이 그것에 대하여 무지했던 지도 모른다. 라쉬가 에큐메니컬적인 공간이기 이전에 모든 종교에 열려있는 곳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장애인을 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캐나다는 종교적인 공간이다. 라쉬의 목적 중 하나는 예수의 정신을 따르기 위함이다. 그 정신을 기억하면서, 그 뜻을 따르기 위해 에큐메니컬 운동을 더 추구하는 것이다. 처음 이곳에 왔을때, 유대교 의식을 치렀고, 그 후 부활절 축하 파티를 했다. 그리고 그 다음주 쯤인가 어느 카톨릭 교회에서 주관하는 기도 모임을 가졌다. 일단 리더가 수녀님이다 보니, 카톨릭적인 배경은 무시할 수 없다. 또 개신교 배경을 가지고 있는 봉사자, 어시스턴트, 직원들의 신앙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한 집에서 다 각자의 삶의 방식이 있었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하나가 될 수는 없고, 그것들을 다 존중하고 하나가 될 수 없다. 극단적인 생각일 수 있으나, 그것의 중간지점을 만드는 것도 참 힘들다. 이것이 에큐메니컬의 한계인 것 같다. 모두가 하나가 되기 위해선 어느 한 쪽이 희생하여하는데, 누가 자신의 하나님을 포기 할 수 있을까.

오늘 성당에서 미사를 드렸는데, 설교의 목적은 에큐메니컬적인 삶을 살으라는 것이었다. 말로만 낭만적인 것인가!

횡설수설하고 있지만...
내 결론은 에큐메니컬은 쉽지 않다는 것이다.
Posted by 은기
2009. 6. 22. 14:57

 풀러 신학교의 Jehu Hanciles 교수의 단기 선교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Jehu Hanciles교수의 입장은 단기 선교를 통해서 장기 선교로 연결될 수는 있으나, 당장 선교지의 보탬이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행 중에 한 일부가 선교일 수 있지만, 본인은 단기 선교라는 타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국의 대다수 교회의 단기 선교는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견문을 넓히는 코스들로 짜여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떠나기 전에 많은 기도 준비를 통해서 그 시간을 통해서 개인 신앙 발달에 도움은 될 수 있다. 또한 Jehu Hanciles 교수의 말처럼 선교의 발판이 되는 것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많은 비용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지 정검해 봐야 한다고 생각하다. 많은 단기 선교는 헌금 후원이 있다. 어떤 선교 단체에서는 후원을 위한 계좌를 트고, 그곳에 후원할 것을 알리는 기도 편지를 돌린다. 캠퍼스에서는 왕왕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까지 돌리기도 한다. 물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있어서 어떤 수단과 방법을 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분의 뜻과 참 사랑을 알리기 위한 참 방법이 무엇인지 정점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유다처럼 계산적으로 그 분의 일을 생각하고는 싶지 않다.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께 부은 것과 같은 가치가 있는 선교인지를 생각해 보라는 거다. 

 고로 단기 선교를 가기 전에 철저한 준비와 함께, 선교지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최대한의 방법과, 단기적으로 계획한 선교였지만, 장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끈을 마련하여 장지적으로 선교지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앙 교육에 있어서, 선교인지 여행인지를 분명히 구분지어야 한다.

 
Posted by 은기
2009. 4. 19. 10:50



To become human means to become "poor", to have nothing that one might brag about before God. To become human means to have no support and no power, save the enthusiasm and commitment of one's own heart. Becoming human involves proclaiming the proverty of the human spirit in the face of the total claims of transcendent God. p 10 

이 책을 통해서, 영적 가난함을 채우기 위해 포장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은 아닌지 정검했다. 그러나 현재 내 상태를 받아 드리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가난함도 부함도 아닌 그저 내 자아로 그 분앞에 나가는 것이 아닐까? 또 한 기도하는 삶 역시 그 분 앞에서 내 모습이 어떤 것인지 정검하거나 어떠한 발전도 아니다. 그저 대화일 뿐이다. 그곳이 초자연의 이해가 시작된다.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하나님을 어떻게 설명할까? 어떻게 소개 할까라는 초점에서 그 분을 생각했다. 

 그런데 뜬금없이 맛집이 생각났다. 맛있는 맛집에 줄서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모두가 그 음식을 언젠가 먹어 봐야 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왜 교회는 그런 장소가 되지 못할까 싶었다. 맛있는 음식과 비교할 수 없는 더 아름다운 공동체라면... 그렇다면 그렇게 모여있는 곳에 사람이 모이게 될 것인데 말이다. 맛있는 음식에는 이유가 없다. 그냥 가서 한 번 먹어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도 모두가 그렇게 경험하면 알 수 있는 것인데... 누구에게나 그 분의 사랑은 있는 것인데...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것이 영적 부요함이 될텐데 싶었다. 

예수가 왜 인간의 모습으로 가장 초라한 삶을 보여 주었을까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가장 필요한 사람들에게 항상 함께 하였다. 그것이 영성인데;;; 말이다. 그 삶을 알지도 못하고 따라간다고 생각했던 모습도 반성하게 되었다. 간만에 원서라서 어려웠지만... 문장 하나 하나 읽어 내려가면서, 그 분을 조금은 더 알게 되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책에 관한 좋은 칼럼
 
Posted by 은기
2008. 4. 8. 00:07

*. 어떻게
Virtual faith and future church 수업에서 Harvey Cox의 책 Virtual faith를 읽는다. 평소 많이 듣기는 해서 안다고 생각했지만, 알지 못하는 것이 나의 현실이다. 짬을 생겨서 도서관에서 휘리릭 읽을 수 있는 책을 손에 넣고 읽게 되었다.  


*. 책정보
신의 혁명과 인간의 책임 / 하아비 콕스 저 ; 마경일 역. 서울: 현대사상사. 1974. 187p


*.첫느낌
나보다 나이가 많은 책을 손에 넣으면 책을 만졌던 사람들의 정기가 나에게 들어오는 느낌이 있다. 말로 많이 듣던 홍현설학장님께서 기증하신 책이었다. 읽기도 전에 책 자체가 나에게 주는 느낌은 좋았다. 친필 사인이 주는 힘인 것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하비콕스(Harvey Cox,1929년-) ;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사회윤리학을 강의하는 신학자
[생애]
펜실베니아 대학교와 예일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며, 하버드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2년 1년간 독일 베를린에서 거주하면서 동독 교회와 하버드대학교간의 연락을 받는 일을 하였다. 귀국후에는 흑인민권운동에 참여했으며, 보스턴 흑인거주지역에서 살면서 흑인해방과 민권운동을 위한 사회운동을 하였다. 저서로는 《예수, 하버드에 오다》와 《세속도시》가 있는데, 모두 한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원본 주소 ‘http://ko.wikipedia.org/wiki/%ED%95%98%EB%B9%84_%EC%BD%95%EC%8A%A4’



*.읽으면서 정리
계획에 없던 도서관 방문이었기 때문에, 정리할 종이가 없었다. 이번달 교회에서 받은 페이 봉투를 활용하여 책을 나름대로 모조리 정리하여 적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정리한 내용을 옮겨본다.

[큰 줄거리 보기]
Ⅰ. 신의 혁명의 세계
Ⅱ. 죄: 인간성에 대한 인간의 언
Ⅲ. 복음: 신의 세계에 대한 그의 말씀
Ⅳ. 성례전: 신의 세계에서 신과 함께 고통한다.
Ⅴ. 봉사의 책무: 신의 세계에서 신과 함께 일한다.

Ⅰ. 신의 혁명의 세계
*.  성서계 말하는 세계
1. 신에 의하여 창조되고 유지되고 심판=> 전적 권리 인정
2. 세계가 신의 사랑과 관심의 대상
- 신은 교회를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한다.
- p28 이름은 의미와 목적을 표시한다.
- 인간으로 부터 세상을 사랑하고, 인간은 신에 대하여 죽고 산다.
3. 세계가 신의 해방과 혁신적 행동 영역

=> 결론; 세계는 크리스천의 생활의 적당한 장소.


Ⅱ. 죄: 인간성에 대한 인간의 언


Ⅲ. 복음: 신의 세계에 대한 그의 말씀
1. 복음?
- 신의 계시로 행동
- 사건이라는 언어(the language of events)
- 살아가는 삶, 즉, J
p80- 81
- 샬롬? "평화" 말이 보여주는 군사적 충돌의 부재 요소, 더 넓은 인격적이고 집단적인 생활의 조건/ 평화, 기쁨, 인간적인 상호의존, 사회적 문화, 고양된 정의. 이사야 65:17-23/ J; "살롬"을 가져오신 분./ 교회;샬롬을 살며 이를 과시하는 사람들/

2. 샬롬 요소
화해, 자유, 희망


Ⅳ. 성례전: 신의 세계에서 신과 함께 고통한다.

<예배의 의미>
*. 구약
1. "hishtaueh(히쉬타워)"; 복종
2. "abhadh(압하드)"; 봉사하다, 섬기다
*. 신약
1. 예수
- communion service(떡을 떼는 일)
- 제례적인 예배는 특정한 때, 장소, 의식적 행사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으나, 예수는 사도행전 2장에서도 볼 수 있듯, "새술에 취했다" 축하와 승리를 강조하였다.
2. 바울(영적예배)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일"
- 손님 접대하기를 힘쓰시오
-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시오
- 악으로써 악을 갚지 마시오

<신약성서에서 세례의 의미>
1. 애굽의 속박으로 부터 탈주(고전 10:1-4)
2. "율법 없는 자"들과의 연대성
3. 십자가형(롬 6:3-4)


Ⅴ. 봉사의 책무: 신의 세계에서 신과 함께 일한다.



Posted by 은기
2008. 3. 11. 09:51





Samuel Rayan, S. J. 저
                          정연복 역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첫째 마당: 소중히 여겨야 할 것

   
 
   
 

땅은 소중하다. 땅은 하나님에게도, 그리고 우리에게도 소중하다. 땅이 소중하다는 것은 성경과 모든 부족민의 전통의 핵심 증언이다. 하나님은 땅의 가치와 경이로움을 제대로 평가한 첫 번째 분이셨다. "하나님께서는 마른 땅을 뭍이라,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 부르셨다. 하나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 1:10).

"이리하여 땅에는 푸른 움이 돋아났다. 낟알을 내는 온갖 풀과 씨 있는 온갖 과일나무가 돋아났다. 하나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 1:12).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만드신 두 큰 빛 가운데서 더 큰 빛은 낮을 다스리게 하시고 작은 빛은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또 별도 만드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빛나는 것들을 하늘 창공에 걸어 놓고 땅을 비추게 하셨다 … 하나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 1:16-18).

"하나님께서는 '바다에는 고기가 생겨 우글거리고 땅 위 하늘 창공 아래에는 새들이 생겨 날아다녀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큰 물고기와 물 속에서 우글거리는 온갖 고기와 날아다니는 온갖 새를 지어내셨다. 하나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 1:20-21).

"하나님께서 '땅은 온갖 동물을 내어라! 온갖 집짐승과 길짐승과 들짐승을 내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온갖 들짐승과 집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길짐승을 만드셨다. 하나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 1:24-25). "이렇게 만드신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 1:31).

땅은 하나님과 우리에게 소중하다. 땅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 땅은 유일무이한 것이요, 땅과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땅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답다. 한 무명의 땅의 연인은 우리를 땅에 대한 명상으로 초대한다: 만약 땅의 직경이 겨우 몇 피트밖에 되지 않는다면, 그래서 들판 어딘가에서 몇 피트 상공을 떠돈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보기 위해 도처에서 몰려올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 주위를 걸어다니면서 그것의 큰 물웅덩이들과 작은 물웅덩이들, 그리고 그 웅덩이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고 놀랄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 위에 있는 돌기들과 그것 안에 있는 구멍들,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매우 얇은 가스층, 그리고 이 가스 위를 떠도는 물을 보고 놀랄 것이다.

사람들은 둥근 공 모양의 표면 위를 이리저리 걸어다니는 모든 것들, 그리고 물 속에 사는 모든 것을 보고 놀랄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더없이 소중하다고 선언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과 같은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또 사람들은 그것이 상하지 않도록 보호하려 할 것이다. 이 둥근 공 모양의 땅은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위대한 경이로움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사방에서 몰려와 그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보면서 마음의 상처를 달래고, 그것에 관한 지식을 얻고, 그것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어떻게 이런 것이 존재할 수 있는지 놀라워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하고 목숨 바쳐 보호하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것이 없이는 그들의 생명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854년 인디언 추장인 시애틀(Seattle)은, 부족민들은 땅을 보고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는 신적인 능력을 물려받았음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이 땅의 모든 부분이 우리 부족민에게는 신성하다. 빛나는 소나무 잎들, 모래가 쌓인 해안, 울창한 숲 속의 모든 안개, 투명하고 콧노래를 부르는 곤충은 우리 부족민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 신성하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 아름다운 땅을 결코 잊지 못한다. 왜냐하면 땅은 아메리카 인디언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땅의 일부분이며 땅은 우리의 일부분이다. 향기로운 꽃은 우리의 자매요 …, 우리 선조들의 재(ashes)는 신성하다. 그들의 무덤은 거룩한 땅이요, 마찬가지로 이 언덕들, 이 나무들, 땅의 이 부분도 우리에게는 신성하다 … 공기는 아메리카 인디언에게 소중하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가 같은 숨을 쉬고 있기 때문이다. 공기는 땅의 정령을 땅이 지지해주는 모든 생명체와 함께 나눈다. 우리의 하나님은 동일한 하나님이다. 이 땅은 그분에게 소중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땅을 경멸하거나, 남용하거나, 낭비하거나, 정복하거나, 약탈하거나, 사유화하거나, 파괴시킬 수 없다. 땅은 우리의 존경과 애정을 받아야할 가치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땅을 건강하고 온전하고 아름다운 상태로 물려주어야 한다. 땅은 그들에게 생명의 근원과 토대가 되어야 한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처럼, 땅은 그들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의 성례전과 기본적인 은총이 되어야 한다.

땅은 하나님께서 인류 및 모든 생물과 함께 나누시는 생명과 사랑의 모든 은총을 요약하는 상징이다. 땅은 사물이나 대상이 아니라 관계적인 현실(relational reality), 즉 마음에서 마음으로 생명과 사랑을 역동적으로 중재하면서 활기 넘치게 생존해 있는 하나의 현실이다.

땅은 빵이나 쌀과 같은 친교요, 모든 존재의 통일성(togetherness)의 경축이다. 그러므로 개인이나 집단은 땅과 땅의 모든 자원을 약탈하고 독점하는 일을 피하고 예방해야 한다. 땅과 땅의 모든 자원은 그 어디에서나 인류에게, 모든 사람에게 공동으로 속하는 것으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 하나님 백성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가능성에 봉사하려는 땅의 자유를 보장하는 한에서만, 기본적인 자원들 그 이상의 것에 대한 분배가 정당화될 수 있다. 땅을 포로로 사로잡고 또 땅이 땅의 배고픈 자녀에게 생명의 우유를 가지고 신속하게 다가서는 것을 가로막는 (땅에 대한) 배타적인 사적 소유권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러므로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은 땅이 몇 사람의 수중에 집중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땅의 본성 및 목적에 어긋나는 불의한 것으로 간주했다. 땅은 언제나 땅 본래의 친교적인 성격을 유지해야 한다 : 하나님과의 친교, 그리고 우리 인간들 사이에서의 거룩한 친교(holy communion). 땅은 언제나 성찬식의 신비를 유지해야 한다. 즉 땅은 이 세계의 생명을 위해 베풀어진 하나님의 빵이요, 하나님의 몸이다. 많은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이 취했던 자세를 우리는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1. 초기 교부들의 토지 소유권에 대한 교리와 가르침의 기초는 인간의 평등이었다. 평등은 다음에서 흘러나온다: (1) 하나님의 마음에 뿌리내리고 있는 우리의 공통된 기원(또한 우리는 땅의 마음과 자궁을 여기에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2) 우리의 공통된 성격(우리 모두는 동일한 기본적 욕구들과 사랑할 수 있는 동일한 힘을 갖고 있다); (3) 우리의 공통된 운명(우리 모두는 하나님 안에서의 삶과 인간 상호간의 삶에로 부름을 받고 있다).

이로써 우리 모두는 창조주의 평등한 허락을 받고 있다. 이 평등한 권리들을 가지고 우리 모두는 공기를 호흡하고, 대지를 걷고, 고귀한 인간 실존에 필요한 땅과 그 밖의 생산적 요소들을 사용한다. 우리는 동일한 역사를 공유한다. 우리는 동일한 대지를 공유한다. 공동의 대지를 사용할 수 있는 우리의 권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권리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평등한 권리에 의해서만 제한된다. 인간의 기본적인 평등은 하나님의 땅이 집중화되고 사유화되는 것을 금지한다.

2. 땅은 이 땅 위에 사는 하나님의 가족 전체를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것이다. 땅은 교부들이 공동의 재화(ta koina)라고 부르는 것, 즉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 예정된 것이다. 땅은 누군가의 노동의 산물(ta idia)이 아니다. 교부들은 공동의 하늘, 공동의 빛, 공동의 우주에 대해 말한다. 그들에게 있어 땅과 공기, 물은 "생명의 근원들"(causes of life)이다. 그 누구도 이 생명의 근원을 박탈할 수 없고, 그 누구도 이 생명의 근원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도록 강요당할 수 없다.

3.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사적인 소유권, 다른 사람을 무소유와 가난한 상태에 머물도록 하는 땅의 집중과 부의 축적은 사기와 강탈, 약탈과 근본적인 불의를 내포한다. 가난한 사람 한복판에서 부자는 도둑놈이다. 재산을 상속하는 것은 훔친 물건을 축적하고 전달하는 것이다. 이 훔친 물건을 다시금 공동체로 복귀시키는 것은 정의의 요구다.

4. 교부들이 정죄하는 것은 사적 소유권의 남용만이 아니다. 그들은 사적 소유권 제도까지를 문제삼는다. 그들은 모든 사유재산을 탐욕, 폭력, 박탈, 약탈, 그리고 도둑질과 동일시한다. 그들에 따르면, 사유재산은 온갖 불화와 갈등,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이 아니라 인간의 법, 황제의 법에 불과하다. 그것은 땅이라는 직물(fabric) 안에 분명히 새겨진 하나님의 목적과 모순된다.

5. 초기 기독교 저술가들은 사적 소유권을 우상숭배로 여겨 배척한다. 사적 소유권은 탐욕을 내포하고 있는데, 바울은 이 탐욕을 우상숭배와 동일시한다. 독점적 권리에 대한 사적 소유권의 주장은 땅과 땅의 온갖 풍요로운 것들에 대해 갖고 계신 오직 하나님만의 절대적 권리에 맞서는 행위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부를 존중하는 한에서만 우상숭배를 피할 수 있다. 진정한 의미의 부는 한 형제요 자매인 우리 모두, 우리의 모든 공동체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땅과 부는 우정과 함께 나누는 생명과 삶의 매개체다.

6. 사도행전 2장과 4장, 또 떡을 떼는 일에 있어 평등의 실천에 대한 본문들(고전 10장, 11장)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초기 교부들이 열렬히 추구했던 것은 그런 충족과 공동체였다.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재화를 공동으로 소유하라는 종교적 명령들이 교회에 출현한 것은, 친구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본래적인 자기이해가 지배계급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질식당하던 때, 그리하여 교회 자체가 로마의 사회적 현실의 모습을 따라 개조되어가던 때였다. 이런 움직임들은 기독교 초기의 공동사회적(communitarian) 비전에 대한 어떤 기억을 지켜가려는, 또 "너희-하나님의 백성들-사이에 가난한 사람이 없도록 하여라"(신 15:4)는 신명기적 권고를 새롭게 인식하려는 시도들이었다. 공동 소유권의 이상은 교회에서 복음적 가치로서 늘 높이 평가받아왔다.

복음적인 것이 많은 사람, 혹은 마을과 도시, 국가와 세계가 아니라 일부 사람에게만 유익한 것으로 공공연하게 주장되는 오늘의 현실에서, 그 이상은 아마도 우리의 신학적·영적 애매모호성을 재는 척도가 될 것이다. 땅은 우리가 우리의 뿌리로 되돌아갈 것을, 그리하여 거기에서부터 하나님과 땅의 새로운 꿈의 공동체를 꽃피울 것을 요구한다. 


둘째 마당: 땅의 상품화, 땅과 인구비율의 전 세계적 불균형, 생태계의 위기

오늘날 땅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있어 세 가지 요인이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이 요인들은 땅과 땅의 신비에 대한 성경적·기독교적 견해와 정면으로 모순된다:

1. 그 어떤 진정한 휴머니즘이나 진정한 종교적 관점에서도, 땅은 그저 우리가 소유하고 처분할 수 있는 하나의 "사물"(a thing)로 간주되거나 취급되지 않을 것이다. 땅은 생명,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에 대한 우리의 예배 및 경험과 너무나도 밀접히 연관되어 있으므로 결코 하나의 상품으로 다루어질 수 없다.

우리는 고대의 부족민 전통에서 여러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태평양 연안의 민족들은, 우리가 땅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땅이 우리를 소유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늘 상기시켜왔다. "나는 여러분이 땅 어머니(Earth Mother)의 힘을 얻기 위해 우리 부족의 거룩한 곳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다 … 우리는 땅을 우리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우리는 그녀를 소유할 수 없다. 그녀가 우리를 소유한다."

땅은 소유물이 아니다. 땅은 사람들이다(land is human beings). 벨록(Hilaire Belloc)은 인간을 "땅의 동물"이라고 정의했다. 땅은 절대로 매매와 가격 흥정의 대상인 시장의 한 상품이 될 수 없다. 땅은 우리의 몸이며 우리 자신, 혹은 우리 어머니의 몸이며 어머니 자신, 혹은 하나님의 성례전(sacraments)이다. 땅은 신성하다. 앞서 인용했던 시애틀 추장의 연설을 더 들어보자:

"워싱턴의 최고 우두머리께서 우리의 땅을 자신이 사기 원한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 어떻게 당신네는 하늘, 또 땅의 따스한 기운을 사거나 팔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생각은 우리에게는 낯설다. 우리가 대기의 신선함과 물의 활기 띤 광채를 소유한 것이 아닐진대, 어떻게 당신들은 그것들을 살 수 있단 말인가? … 우리는 땅의 일부분이며 땅은 우리의 일부분이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영적 깊이와 문화적 세련됨은 이런 정도에까지 이른다. 모든 이민자는 이들의 목소리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는 게 좋을 것이다. "백인은 이해하지 못한다 … 지구는 백인의 형제가 아니라 적이다 … 백인은 땅을 돌보지 않는다 … 백인은 자기 어머니인 땅과 형제인 하늘을 양이나 빛나는 염주알처럼 사고 팔고 약탈해도 좋은 물건인 양 다룬다"는 것이 바로 이들 원주민들의 뼈아픈 체험이다. 백인 대표자들이 인디언의 땅을 양도받는 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왔을 때, 블랙피트 부족의 추장은 이렇게 거절했다:

"우리의 땅은 당신네의 돈보다 더 소중하다 … 햇빛이 빛나고 물이 흐르는 한, 이 땅은 여기에 계속 존재하여 사람과 동물에게 생명을 줄 것이다. 우리는 사람과 동물의 생명을 팔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을 팔 수가 없다. 이 땅은 위대한 영(the Great Spirit)에 의해 우리를 위해 여기에 놓여졌고 우리는 그것을 팔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소가 고개를 끄덕이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당신네의 돈을 세고 또 그 돈을 불태워버릴 수 있다. 그러나 오직 위대한 영만이 이 평원의 무수한 모래알과 풀잎을 셀 수 있다. 당신들에 대한 선물로서, 우리는 당신네가 가질 수 있는, 우리가 갖고 있는 그 어떤 것도 당신들에게 줄 용의가 있다. 그러나 땅만은 절대로 안 된다."

모든 원시사회가 공유하는 이런 세계관에서는, 땅은 하나님의 가족, 우리의 자매와 어머니, 생명과 예배 안에서의 우리의 파트너, 그리고 우리와 더불어 공동의 순례자다. 이 땅을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근본적인 이탈이다. 지파동맹체 시대(tribal period)의 이스라엘의 땅에 대한 견해도 이와 유사했다. 이런 초기의 신념들의 주목할 만한 흔적들이 성경의 최종적인 편집 과정에서도 소중하게 간직되었다. 예를 들어, 땅을 영원히 팔아 넘기는 것은 금지된다. 왜? 그것은 많은 사람의 땅이 몇몇 지주의 손에 집중화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땅은 아주 팔아 넘기는 것이 아니다. 땅은 내 것이요, 너희는 나에게 몸 붙여 사는 식객에 불과하다"(레 25:23).

만약 내 추론이 옳다면, 결론은 이런 식으로 나야 할 것이다: 땅은 절대로 사거나 팔 수 없다. 일단 팔린 땅도 언제든지 되살 수 있었다. 즉 땅의 원래 주인이나 그의 친척들이 돈을 되돌려주면, 땅을 산 사람은 땅을 되돌려주어야 했다. 땅을 산 사람은 땅을 계속 소유할 아무런 권리도 없었다(레 25장; 신 15장). 땅을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시킴으로써 땅을 모독하는 행위는 계급사회의 도래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런 행위는 고대 로마에서 일상적 관행이 되었고, 봉건사회로 전달된 로마의 법은 고대 문화에 대한 식민지 정복의 여러 세기를 거치는 동안 자본주의의 지배적 정신으로서 전 세계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제 땅은 상업적 문화의 노골적인 폭력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성례전으로서의, 그리고 우리의 함께 나누는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본래적인 존엄성을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

2. 땅에 대한 기독교적 전망과 모순되는 두 번째로 중요한 요인은, 지구 표면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분포가 현재 전 세계적으로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을 신학적 문제로 제기하는 티사 발라수리야는 이런 불평등한 분포에서 "세계체제의 주된 결점들과 불의들 중의 하나"를 목격한다. 1500-1950년에 이르는 유럽의 팽창은 사람들이 거주하기에 알맞은 땅들의 대부분을 유럽인이 점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서유럽인들은 북미와 중미, 남미, 호주, 뉴질랜드, 그리고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들을 점령했다. 그들은 중국과 일본, 그리고 태국을 제외한 아시아 전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동유럽의 한 민족인 러시아인들은 태평양과 중국과의 경계선까지 그들의 제국을 넓혔다. 유럽인들은 "지구의 거대한 열린 공간들 중의 대부분"을 제것으로 만들었으며, 유럽과 미국 국민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민족을 영원히 지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하나의 세계체제를 건설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세계는 "백인 민족주의(white-racist) 세계체제"이다.

불균형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전체 인류의 40퍼센트를 구성하는 인도와 중국, 일본의 인구는 지구 표면의 10퍼센트만을 차지하고 있다. 반면에 세계인구의 겨우 1퍼센트를 구성하는 캐나다와 호주와 뉴질랜드는 지구 표면의 13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보다 아주 조금밖에 작지 않은 브라질은 중국 인구의 겨우 10분의 1만을 먹여 살린다. 볼리비아는 일본보다 세 배나 큰데, 일본이 1억 1,500만의 인구를 가진 것과 비교하여 겨우 5백만 인구밖에 안 된다. 뉴질랜드 면적의 겨우 반밖에 되지 않는 방글라데시는 뉴질랜드의 25배나 되는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 북미에서는 땅 대 농업노동자의 비율이 78.4대 1임에 반하여, 아시아와 태평양 연안 국가들에서는 그 비율이 0.98대 1이다. 중국과 다른 중앙 집중화된 경제지역들에서는 그 비율이 훨씬 더 낮아져 0.51대 1이다.

이런 인위적으로 야기된 부당한 불균형에는 인종 차별주의 차원 또한 담겨 있다: 전체 세계체제는 일종의 인종차별주의에 기초한다 … 서로 상이한 인종집단들은 그들이 그 안에서 살아야만 하는 개별적이고 불평등한 "보전자"(preser-ves), 즉 땅을 할당받는다. 황인종은 중국과 일본, 그리고 인접한 섬들을 갖고 있다. 흑인은 아프리카를 갖고 있다.

갈색 인종에게는 인도, 파키스탄, 그리고 동남 아시아가 할당되어 있다. 세계의 나머지 지역들은 주로 백인들 몫이다. 흑인과 황인종, 혹은 갈색 인종이 백인 지역에 자유롭게 이민을 갈 수 있다고는 해도, 그것은 주로 백인을 위한 노예 혹은 값싼 노동자로서 그러할 뿐이었다.

이런 현상은 오늘까지도 계속된다. 호주는 백인이 자기네 땅에 들어와 살도록 광고까지 하며 짐바브웨에서 25만의 백인을 기꺼이 맞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2만5천의 아시아인은 마지못해 받아들이며, 그것도 나름대로 기술과 교육과 재정적 여력이 있는 사람만 받아들인다. "영토가 넓은 그 어느 나라도, 세계인구의 재정착(resettlement)을 기본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인종차별주의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비극적인 사실들은 바로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다. "영토에 비해 인구가 적은 모든 나라들, 즉 미국, 소련, 캐나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호주, 뉴질랜드는 아시아인을 차별대우하는 이민법을 갖고 있다." 이런 전 세계적 불균형과 인구가 적은 나라들의 이민정책은 "인간의 발전과 정의를 가로막는 가장 치명적인 장애물들 중 하나"이다. 따라서 여러 민족에게 땅을 평화롭게 재분배할 수 있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 기본적으로 요구된다.

이것은 세계적인 협의사항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인류의 창조적 성장이 땅의 올바른 사용 및 변형과 관계 맺을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이것은 오염과 쓰레기를 줄일 것이다. 왜? "북미와 호주에 현재 거주하고 있는 자들과는 달리, 제3세계 사람들은 땅을 돌보는 오랜 전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세계발전의 문제들을 다루는 그 어느 국제기구도 문제의 이 측면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지 않다 … 현재의 영토분포는 절대로 손을 댈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땅을 이런 식으로 다루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땅의 자녀들 모두에게 거주할 집을 주고, 또 그들을 알맞고 바르게 양육하고 싶어하는 땅의 소명과 갈망과 같은 근본적인 실제들을 간과하는 것이다.

3. 땅과 자연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 심지어 인간적 관점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세 번째 요인은 생태계의 위기다. 이것은 단순히 기독교적인, 혹은 그 밖의 견해들과 신학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것은 이 지구라고 하는 지극히 작은 행성 위에서의 인간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다. 오늘날 지구는 산업과 농업, 대중매체의 모든 면에 있어 이익 지향적 과학적-기술적 현대문화의 낭비적이고 방탕하고 약탈적인 관행들로 말미암아 오염되고 파괴되어가고 있다. 생명의 집으로서의 지구의 본래적인 위치와 의미와 역사가 죽음의 위협 아래 놓여 있다. 위기의 징후들은 사방에 널려 있다. 소중한 자원들이 무기경쟁, 핵무기 축적, "별들의 전쟁"(Star Wars), 그리고 이와 유사한 미친 짓거리들 같은 파괴적이고 해로운 목적에 헛되이 사용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지구와 지구의 생명을 부분적으로, 전적으로, 혹은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파괴할 수 있으며 또 지금까지 파괴해왔다. 핵 폐기물, 방사능 폐기물, 그리고 그밖에 치명적으로 유독한 폐기물을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바다나 섬, 대륙에 마구 쏟아 붓고 있다. 공장에서 나오는 오염물질 및 이로 말미암은 산성비와 함께, 이것들은 식물과 새, 짐승과 물고기, 호수와 강, 인간에게 대규모의 질병과 죽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독성 연기로 자욱한 대부분의 도시의 대기는 건강과 생명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몇 개의 지명만 거론해보더라도, 쓰리-마일 섬, 비키니 아톨, 보팔과 체르노빌은 우리의 경제적 및 정치적 체제라고 하는 현대의 몰록(Moloch)이 요구하는 인간적 희생물의 상징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그릇 선택한 방향으로 계속 돌진할 때, 땅과 우리에게 어떤 일이 예정되어 있는지 알리는 불길한 경고다.

화학비료와 살충제는 토양을 오염시키고 지력을 떨어뜨린다. 그것들의 과도한 사용은 이 땅과 땅의 생물의 건강에 크나큰 재앙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물은 남용되거나 낭비되고 있으며, 지하수의 근원은 날로 메말라가고 있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 축적과 일회용 소비자중심주의 문화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마구 열대림을 베는 것은 지구 온도 상승, 기상 조건의 급격한 변화, 그리고 오존층 파괴를 야기한다. 이미 이것들은 지구의 울창한 산림과 비옥한 들판을 사막으로 전락시키는 위협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이런 문화체제 안에서, 환경의 파괴는 여러 형태의 사회적 오염들과 병행하여 일어나고 있다. 실업의 증가, 음식과 물 같은 인간의 기본 욕구들을 채우기 위해 엄청난 수의 대중이 몇몇 권력의 중심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 광범위하고 심화된 상품화된 삶의 분위기 속에서 가난한 사람들(특히 여성과 아이들)이 착취당하고 날로 지위가 격하됨, 사람들이 점차적으로 자연과의 조용한 친교로부터 떨어져나가고, 그들의 상호 관계가 약화되며 기계화되고, 시와 신비에 대한 그들의 소박하고 필수적인 감정이 천박한 실용주의나 지나친 탐욕 때문에 메말라질 때 강렬하게 느껴지는 고독감과 무의미성의 고통 등이 대표적인 사회적 오염이다. 가장 큰 오염은, 이제 기계가 땅과 인간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 싱싱한 생명과 창조적인 상상력의 근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결국 기계가 인간을 다스리게 된 것이다. 파괴적인 과학기술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는 인간과 땅의 느리거나 신속한 죽음을 암시해준다.

<땅을 위한 진혼곡>이라는 우리 시대의 시편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생명의 어머니이며 집인 땅을 약탈하고 파괴시키는 광기에 맞서는 날카롭고도 강력한 항의다.

땅이여,
아직 죽은 것은 아니지만
막 숨이 넘어가려고 하는
그대에게 평화 있어라.

여기 한 노래가 있다.
그대와 나의 장례를 위하여
내 가슴속에 휘갈겨 쓴 노래.

독성이 서린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내일 그대의 몸은 차갑고 무감각하게 되리니,
그때에는 아무것도 이 땅에 남지 않으리라.
나 또한 이 땅에 존재하지 못하리라.
그리하여 그대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혹은 그대의 잿빛 얼굴에
한 방울 눈물을 떨구기 위하여,
막 숨이 넘어가려고 하는 그대,
땅을 위하여 내 이 노래를 휘갈겨 쓰노라.
그대는 수없이 많은
비사교적인 자녀들을 낳았지.
그대는 그들이 서로 잡아먹는 것을 보며
남몰래 슬픔의 눈물을 흘렸지.
언제부터인가 그들은
그대를 잡아먹기 시작했지.
그러나 그대, 모든 것을 참아내는 그대는
아무런 저항이나 방해의 몸짓도 하지 않았지.
그대의 품안에서 젖을 빨며
포동포동 살이 오른 그들은
새로운 갈증을 느꼈지.
그대의 신성한 가슴의 피를 빨아먹고픈
그들의 마지막 갈증을.
그들은 태양이 사랑하는 신부에게 입혀준
녹색 옷을 그대에게서 벗겨버렸지.
그대의 여린 살 속으로
그들은 날카로운 손톱자국을 새기고,
그대의 상처에서 용솟음치는
피를 빨아먹었지.
그대 자신의 자녀의 죄와 수치라는
무거운 짐 아래,
약탈당하고 추방당하고
머리가 벗겨지고 등이 굽은 그대.
이제 그대는 우주 속에서
홀로 방황하노라.
땅이여, 아직은 죽지 않았지만
막 숨이 넘어가고 있는 땅이여,
그대에게 평화 있어라.


셋째 마당: 들의 꽃과 하늘의 새를 보라

최근 들어 영적·신학적 작가들은 우리를 회심에로 부르면서 우리가 멈추어 서서 끊임없이 고갈되고 있는 땅과 땅의 충만한 것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재고하고 새롭게 느껴볼 것을 요구해 왔다. 자연에 대한 우리의 무책임한 접근방법은 이제 종말을 고해야 한다. 하나님의 침묵하는 피조물에 대한 전통적인 “정통적 기독교적 오만”은 이제 포기되어야 한다. "땅 자체의 법칙과 요구, 리듬과 한계에 대한 고려 없이 땅을 지배하기 원하는 것은 자연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결핍을 말해주는 명백한 증거이다"라고 말하는 티사 발라수리야의 주장은 참으로 옳다. "땅을 정복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또한 "땅을 돌보아라"고도 말씀하셨다(창 1:28; 2:15).

우리 자신에게서 물질에 대한 모든 비열한 경멸을 제거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존재하게 하는 것에 대해 존경심을 품은 관심을 발전시키는 일은 꼭 필요하다. 자연에 대한 시적(poetic) 접근은 환원주의적인 과학적·기술적 접근과 균형을 이루면서 과학적·기술적 접근의 잘못된 점들을 교정해주어야 한다. 예수의 발자취를 쫓아 꽃을 바라보고 새를 명상하면서 신비와 대면하는 것, 성 프랜시스와 더불어 모든 피조물의 평등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인간, 해와 달, 물과 불을 하나의 무지개 현실(a single rainbow reality)로 통합시키는 자매성을 깨닫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모든 형태의 생명에 담긴 신비와 생명의 담지자로서의 땅의 신비에 대한 느낌도 중요하다. 이 신비는 궁극적인 신비, 즉 모든 실재의 자궁과 결합되어 있다.

이제 우리는 전통적인 저 세상적(other-worldly) 및 이 세상적(inner-worldly) 금욕주의를 넘어 세상을 위하는(pro-worldly) 금욕주의라는 새로운 형태의 금욕주의의 필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이 새로운 형태의 금욕주의는 땅과 사람들, 하나님이 벌이는 흥겨운 "잔치"(conviviality)로 펼쳐진다. 이 잔치에서, 땅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세상적(terrestrial) 가족과 친구들을 위해 차리신 인류 공동의 식탁으로 인식된다. 우리는 경쟁적인 쟁탈전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양육하고 보호하는 즐거운 친교 가운데 이 식탁 주위에 함께 모인다. 이런 잔치는 "땅과 생명에 필수적인 자원들의 불균형한 분배"를 유지시키는, 그리고 "생태계의 섬세한 내적 관계를 파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불의한 사회제도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거절을 요구한다.

만약 땅의 직경이 겨우 몇 피트밖에 안 된다면 …
사람들은 도처에서 몰려와 그 광경을 보고 놀랄 테지 …
사람들은 땅 주위를 걸어다닐 거야 …
사람들은 땅을 사랑하고
목숨 바쳐 땅을 보호할 거야.
왜냐하면, 어떤 식으로든
그들은 알게 될 거니까 …
땅이 없이는,
그들 자신의 활기 또한
존재할 수 없으리란 걸.
만약 땅의 직경이
겨우 몇 피트밖에 안 된다면.


                                                                                                                       

출처 :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399
입력 : 2008년 01월 02일 (수) 12:47:32 당당뉴스

이상적인 이야기일까?
재산과 부의 상징인 토지.
세상에게 이 말이 통할까!
나는 공감하고,
나는 감동받았지만,
나에게 땅이 있다면 공감할 수 있을까?
나에게 공장이 있다면 공감할 수 있을까?
내가 꿈꾸고, 생각하는 것이 파라다이스가 아니였으면 좋겠다.




Posted by 은기
2008. 2. 20. 15:40
 
Kwok Pui-lan
                                          정연복 역(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들어가는 말
 
아시아의 종교예술에서 원은 서구유럽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상만큼 중요하다. 티베트 불교의 승려들은 신성한 것에 대한 자신들의 시각화를 강화하려고 모래로 만다라를 만든다. 부처의 평온한 모습은 원들과 동심원들을 사용하여 묘사하는데, 이 원들은 마음의 평화, 자비, 그리고 완전을 상징한다. 힌두교의 신화와 종교예술에서는 인간의 고통과 유한성을 드러내기 위해 환생(還生)이라는 강력한 상징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육지 가까이 사는 사람들은 늘 달과 별의 운행을 순환적인 방식으로 묘사해왔다.

원의 이미지는 생물학적인 면과 상징적인 면 모두에서 여성들에게 있어서도 중요하다. 여성의 몸은 의미심장한 호르몬 및 생리적 변화를 동반하면서 주기적인 순환을 따른다. 남성들보다 계절의 순환과 보다 잘 조화를 이루는 여성들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달이 차고 기울 때 의식들을 거행해왔다. 오늘날 여러 영성 모임에 참여하는 여성들은 자신들의 연대성을 드러내기 위해 원을 그려 사라나 하갈의 춤을 추고 자매됨의 친교를 나타내는 원을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다.

계몽주의 이래 서구의 기독교는 시간과 역사를 직선적이고 진행적인 방식으로 이해해왔다.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는 과학과 과학기술의 여러 발전을 통해 강화되었다. 그러나 생태학적 인식을 가진 기독교인들은 계몽주의의 전제들과 과학기술의 가정들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그들은 “재활용”을 의미심장한 생태학적 및 영적 주제로서 재발견했다. “당신은 기독교인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에, 『묵시에서 창세기까지: 생태학, 페미니즘, 그리고 기독교』의 저자인 프리머베시는 자신이 “재활용된 기독교인”이라고 답한다.

아시아인들과 전 세계의 여성들과 양심적인 기독교인들은 거룩한 것과 자연 과정(원, 순환, 그리고 재활용)에 대해 말할 때 갑작스럽게 공통언어를 발견한다.

1. 생태학과 여성의 관심사들
 
오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생태계의 위기는 인간과 모든 지각 있는 생물들, 그리고 자연을 잇는 거대한 사슬이 끊어진 결과다. 이런 상호 연관을 무시한 데 기인하는 생태계 균형의 파괴는 이 사슬 중에서도 가장 약한 연결고리인 제3세계의 영성과 아이들에게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산림 황폐화, 산성비, 토양침식, 그리고 비료와 살충제의 무분별한 사용은 대부분의 여성과 아이들이 의존하고 있는 경제, 즉 지역의 살림살이 경제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날로 점점 더 많은 수의 여성이 공장에서 값싼 노동자로 일하기 위해 도시로 몰려들고 있는데, 그들 중 일부는 결국 날로 번성하는 섹스산업에 자신의 몸을 파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본국에서 직장을 구할 수 없는 또 다른 여성들은 미국의 멕시코만에 연한 5개 주(Gulf states)나 그밖에 새로 산업화된 나라들에서 일자리를 구하려 애쓴다. 이런 이민 노동자들의 상당수가 착취당하고 있으며 또 일부는 성적으로 학대받고 있다.

제3세계 여성들은 산업과 과학기술의 성장에 기초한 발전모델들에서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한다. 사실 그들은 소위 “국가발전”이나 “경제기적”을 위해 혹독한 인간적 희생을 치러왔다. 여성들의 생산적인 노동력과 성은 착취당한다. 여성들의 삶은 과학기술의 감시, 국가 및 기업의 통제에 더욱 더 종속되어가고 있다.

제3세계 여성들은 인구폭발 및 인간과 천연자원 사이의 불균형을 초래한다는 비난 또한 받고 있다. 새로 개발한 약제들과 피임기구들은 제3세계 여성들을 실험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그들 중 많은 수의 여성이 불임을 강요당해왔다. 초음파검사 같은 과학기술의 발전들은 여성 태아의 선택적 유산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낳는다. 최근의 인구통계학 연구에 따르면 이런 식으로 전 세계에서 실종된 여성이 무려 1억에 달하는데, 그 가운데 60%가 아시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과학기술의 통제를 받는 서구지향적 발전모델과 가부장제는 주변화된 여성들의 삶을 지배하는 “사악한 삼위일체”(unholy trinity)를 형성한다. 1992년 나이로비에서 열린 제3세계 신학자들의 에큐메니컬 모임에 참가한 사람들은 여성을 비인간화하는 가부장제 구조들을 비판했다. 이 구조들은 여성들의 제반 권리, 그리고 경제적 및 정치적 자유를 부정하며 여성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낳기 때문이다. 그러한 억압들은 종종 가부장제 종교들, 남성 중심적 언어와 표현들, 그리고 고전문학과 성경에 대한 남성 편향적 해석에 의해 묵인되거나 강화된다. 여성해방 철학자인 매리 데일리(Mary Daly)는, 이제 여성들은 “여성 생태학”, 즉 여성들의 복지와 성장에 유익한 환경에 대해 말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2. 기독교의 재활용
 
생태계의 위기와 여성들의 지위 격하는 과연 기독교가 내적인 연관과 상호성, 그리고 생태정의(eco-justice)를 증진시켜왔는지 깊이 반성해 볼 것을 우리에게 촉구한다. 생태계의 문제를 의식하는 많은 기독교인들은 인간 중심적, 위계질서적, 그리고 가부장제 종교제도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기는커녕 바로 문제의 일부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의 전통적인 기독교적 신념들 중 어떤 것은 재활용의 과정을 거쳐 현대 세계에 맞게 새롭게 사용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전통에서 “재활용”이란 개념은 새로운 게 아니다. 회심, 회개, 그리고 심지어 부활이라는 종교적 주제들까지도 우리에게 재활용의 의미를 상기시킨다.
 
(1) 위계질서적 모델에서 생태학적 모델로

여성해방 신학자들은 하나님과 세계에 대한 이원론적, 위계질서적 이해야말로 서구 기독교가 안고 있는 문제의 뿌리임을 이미 오래 전부터 지적해왔다. 존재의 위계질서는 하나님을 인간보다 무한히 위에 놓으며, 마찬가지로 인간을 자연보다 위에 놓는다. 이런 이원론적 세계관은 정신과 육체, 남성과 여성, 그리고 인간과 인간 이외의 세계를 엄격히 분리시킨다. 따라서 한 개인이나 자연물의 가치는 그것의 본질적 가치나 존엄 대신에 위계질서 안에서의 그것의 위치에 따라 결정된다. 생태학적 모델은 하나님을 이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는 분으로, 그리고 인간 위에 존재하는 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자연은 상호 의존적이며 상호 관련된다. 한 원의 각 점이 원의 중심 및 원의 다른 점들과 관련되는 것과 똑같이, 세계에 대한 이원론적 이해는 이제 상호 연관적이며 전체적인 이해에 자리를 내주지 않으면 안 된다. 생태학적 모델은 생물권(biosphere)에서의 다양성을 가치 있게 여기며 인종, 성(性), 성적 태도에서의 다양성을 존중한다.
 
(2) 인간중심주의에서 생물중심주의로

서구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우주의 중심에 위치한다. 전체 피조계는 인간의 이익을 위해 창조되었으며, 따라서 인간은 고기와 새, 땅 위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고 지배해야 한다. 이 피조계는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정죄당하고 저주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간은 구원의 가능성을 부여받는다. 그리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의 의무를 떠맡음으로써 지구를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구와 생물권의 이야기를 통해 피조계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이해할 수도 있다. 토마스 베리(Thomas Berry)에 따르면, 지구라는 혹성은 약 100억 년 전에 생겨났고, 그후 70억 년이 지난 후에 지구에 생명체가 생겨났다. 식물들은 약 6억 년 전에, 그리고 동물들은 그보다 조금 후에 처음 출현했다. 인간의 의식이란 것은 겨우 약 2백만 년 전에 등장했다. 이렇듯 생물권은 우리보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20세기 들어 생물학자들은 이 생물권이 얼마나 복잡한가를 이제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했다. 지구가 전적으로 우리의 처분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고, 또 드넓고 거대한 은하계의 구원이 겨우 50억의 인간에게만 달려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교만한 일이다.

서구의 인간중심주의에서는 하나님을 인간의 형상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한다. 하나님은 왕, 아버지, 재판관, 그리고 용사다. 하나님은 인간의 사건들에 개입하는 역사의 주님이다. 이와 반대로, 동양인들과 흙에 매여 사는 토착민들은 신적인 것, 곧 도(道, Tao)를 말없고 비침입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존중과 경외의 마음을 갖고 땅을 어머니, 생명을 지탱하고 긍정하는 어머니라고 말한다. 인간중심주의에서 생물중심주의로의 전환은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는 방식의 변화 또한 반드시 필요로 한다.
 
(3) 수동적(소극적) 영성에서 열정적(적극적) 영성으로

올바른 영성을 추구하는 것은 생태계의 위기에 직면한 우리에게 점점 더 긴박한 일이 되어왔다. 과거에는 영성은 금욕주의, 영적인 훈련, 명상, 기도, 그리고 현실을 등진 채 내세를 추구하는 것과 동의어로 여겨졌다. 이원론적인 세계관에서는 영혼은 몸, 감정, 그리고 식욕과 반대된다. 이제 우리는 전체적이며 생명을 사랑하며 구체적인 영성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다. 이 새로운 영성은 수동적(소극적)이고 감정이 없기는커녕 오히려 열정적이며 성적(性的) 활기로 충만해야 한다. 이 영성은 우리가 충만한 잠재력을 갖고 살며, 우리의 모든 관계에서 정의를 추구하며, 그리고 하나님 및 어머니 땅과 더불어 겸손하게 살아가도록 이끌어야 한다. 우리가 낙하하는 별과 가을의 나뭇잎들과 아침 이슬을 볼 때, 이 영성은 우리 마음에 경이와 경외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이 새로운 영성은 우리가 평화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평화는 그저 전쟁이나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평화는 정의로운 관계들에 기초한 조화와 번영, 그리고 더 없는 행복이다. 평화는 정치가와 전략가들이 우리를 위해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내도록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평화는 무기력한 자들에게 권능을 주고, 약한 자들을 강하게 하고, 잘못되어 가는 일들을 바로잡기 위해 우리의 지역사회에서 열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3. 1990년대의 새로운 연대성
 
1990년대 들어 교회들이 직면하고 있는 도전은 정의와 평화와 창조질서 보전을 위한 우리의 헌신의 시야를 넓히고 심화시키는 것이다. 에큐메니컬 운동이 맨 처음 취했던 비전은 교회의 증언과 전도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교회 일치를 증진시키는 일이었다. 1970년대에 서로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보다 광범위한 인간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하나의 단계로서 종교간의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 우리의 에큐메니컬 운동은 교회적 연대성에서 생태학적 연대성으로 옮겨가지 않으면 안 된다.

"연대성"(solidarity)이라는 단어는 프랑스의 법률 전통에서 유래했는데, 동일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결속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후에 기독교 노동운동가들이 이 단어를 사용했는데, 마르크스는 이것을 압제받는 자들이 스스로를 조직화하는 것으로서 이해했다. 유럽에서 이 단어는 강력한 정의(正義)의 전통을 함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아시아인들은 “연대성”을 다소 다른 의미로 이해한다. 중국에서 그것은 하나로 모이는 것, 그리고 서로 연결되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하나의 집단으로 묶여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동양의 언어들에서 그 단어는 만물이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태학적 인식을 불러일으킨다.

생태학적 연대성은 여성들과 연대하는 교회들의 에큐메니컬 10년(Ecumenical Decade of the Churches in Solidarity with Women; 1988-98)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세계교회협의회는 교회들이 교회와 지역사회에서의 여성들의 완전한 참여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인종차별과 성차별과 계급차별에 맞서 싸울 것을, 정의와 평화와 창조질서 보전을 위해 투쟁하는 여성들의 관점과 행동들에 분명한 비전을 줄 것을 촉구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제3세계 여성들은 정의와 인간의 권리와 자유와 창조질서 보전을 위한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왔다. 제1세계에서도 여성들은 평화운동과 녹색운동을 위한 가장 열렬한 지도자들과 환상가들의 대열에 끼어 있다.

생태학적 연대성은 속죄양들을 찾아나서고 새로운 희생자들을 만들어내는 대신에 상호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토착민들은 수세기에 걸쳐 자기네가 자신들의 땅에서 생존 수단은 물론 삶의 의미를 박탈당해왔음을 거듭 말한다. 핵폭발 실험, 방사선 폐기물을 아무데나 내다버리는 일과 핵무기 축적이 저 멀리 유럽과 태평양 연안의 북미에서 계속되는 한, 우리의 세계는 더 이상 안전하지 못할 것이다. 독성 폐기물들이 오클라호마의 오세이지족(Osage nation) 거주지와 남부 다코타의 로즈버드 수족(Sioux, 아메리카 인디언의 한 종족/역자 주) 거주지에 마구 내다버려지는 한, 우리의 도시들 역시 그곳들에 못지않게 위험할 것이다. 우리가 다음 세대들에게 우리가 진 빚을 갚도록 또 우리가 불러일으킨 혼란을 책임지도록 요청하지 않는 한, 우리의 생활은 결코 풍요롭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고 있으며, 따라서 한 생태계의 파괴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생태학적 연대성은 땅, 바다, 산림, 강들, 그리고 산들과 우리 사이의 계약이다. 만약 산들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눈을 그 어디를 향해 들어올려 도움을 청할 수 있을까(시편 121:1)? 만약 들의 나무들이 없다면, 우리가 기뻐 뛰며 밖으로 나갔다가 평화로운 마음으로 돌아올 때 누가 박수를 쳐줄 것인가(이사야 55:12)? 만일 우리가 홍해를 오염시킨다면, 하나님조차도 권능의 기적들을 행하지 못하실 것이다. 자연은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고 천연자원들은 제한되어 있다는 이유로, 자연과 우리 사이의 계약이 두려움과 근심에 기초하고 있지는 않다. 우리는 지구라는 행성과의 우리의 계약을 기쁨과 경축과 감사의 마음으로 새롭게 갱신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연, 그리고 자연 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Kwok Pui-lan, Ecology and the Recycling of Christianity, in: Ecotheology: Voices from South and North, ed., David G. Hallman, Orbis Books, Maryknoll, New York, 1994, pp.107-111의 完譯이다. 그녀는 어머니이고 이야기꾼이며 신학자이다. 홍콩 출생인 그녀는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정의, 평화, 창조질서 보전에 관한 세계대회(서울, 1990), WCC 제7차 회합(캔버라, 1991), 그리고 1992년 리오에서 열린 지구 정상회담 기간 중에 가진 에큐메니컬 집회에서의 생태계에 관한 에큐메니컬 논의에서 그녀는 활발한 활동을 했다.


출처 :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673

Posted by 은기
2008. 2. 20. 15:36

 
▲ 정연복 역(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 K. C. Abraham
들어가는 말

우리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 생태계의 위기는 우리에게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우리의 문제는 가난과 경제적 착취일 뿐, 환경 문제는 산업화된 나라들의 “사치”에 불과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제3세계 여러 나라들의 사회행동 단체와 대중운동들은 생태계의 문제에 대해 비교적 무관심을 보여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 문제가 전체 세계, 즉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 모두에게 얼마나 긴박한 것인가를 깨닫고 있다. 지구의 전체 생명이 위기에 처해 있다. 생태계의 위기는 생존 그 자체의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더욱이 환경 파괴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불의 사이의 유기적 연관에 대한 인식이 날로 심화되고 있다.

사회의 갱신과 땅의 갱신 사이에는 긴밀한 연관이 있음은 전 세계적으로 많은 주변부 단체들의 투쟁 속에서 분명히 보여진다. 토착민들(미국과 캐나다의 원주민들, 뉴질랜드의 마오리인들, 호주의 토착민들,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의 부족들)과 전통적으로 땅과 바다에 의존해온 사람들(소농민들, 어민들, 농업노동자들)은 해방을 위한 그들의 운동에서 이 두 차원을 결합시켜왔다.

가난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또한 토지를 전혀 갖고 있지 못하다. 농업 발전은 부유한 지주들을 도와줄 뿐 가난한 사람들은 별다른 혜택을 보지 못한다. 우리의 도시들에 널려 있는 빈민가의 사람들은 작은 오두막들로 내몰리며,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그들의 투쟁은 그저 주거공간을 확보하려는 데 그친다. 다른 한편, 부자들은 자신의 안락함을 더욱 높이고 확대하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남아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파괴하는 일을 계속한다: 그들의 마을, 그들의 산림, 그들의 가족. 그들의 거주지를 광산 지역으로 변경하려는 인도 정부의 결정에 맞서 유명한 치프코(Chipko) 운동을 벌였던 가난한 부족 여인들의 완강한 저항은, 우리가 가난한 이들의 투쟁과 생태계의 문제들 사이의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인식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오늘날 인도의 나마다(Narmada) 계곡의 가난한 사람들의 외침은 그들 자신의 거주지를 보존하려는 것은 물론 전 세계의 산림이 무차별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진실로 생태계의 위기는 가난한 이들의 외침이며 눈물이다. 박탈과 착취에 대한 그들의 경험은 환경 파괴와 연관된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들에 대한 그들의 관점이 우리의 논의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과학자들, 혹은 자기 집 둘레에 나무 기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제기하는 문제일 수 없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다. 그것은 정의와 해방을 위한 그들의 투쟁에서 필수적이며, 기본적으로 그것은 창조세계를 원상 그대로 보전하는 것에 관한 문제다.

물론 헌신적인 과학자들과 그 밖의 생태학자들은 우리가 생태계의 문제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키는 데 도움을 주어왔다. 과거에 “개발주의자들”(developers)과 과학자들은 자연을 인류의 “이익”을 위해 마음대로 착취해도 좋은 하나의 객체로 간주했다. 환경 파괴의 위험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자연을 길들이는 과학의 능력에 대한 낙관주의적 태도가 우세했고, 그 위험에 대해 어떤 우려의 목소리라도 내는 사람들은 “파멸의 예언자들”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러나 오늘날 점점 더 많은 과학자들이 생태계의 재앙들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촉구하는 일에 가담하고 있다. 그들은 대규모의 대기오염, 수질오염, 토양오염으로 말미암은 환경 파괴는 지구의 생명 그 자체를 위협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설득력 있는 과학 자료들을 정리하고 있다. 재생 불가능한 자원들의 급속한 고갈, 종(種)들 그 자체의 전멸, 날로 얇아지는 오존층, 오존층 파괴로 모든 생물이 방사선에 노출된 위험성, 온실효과를 가속화시키는 가스들의 축적, 날로 증가하는 해안 침식, 이 모든 것이 과학적 조사를 거쳐 문서화된다. 이것과 결부하여 급속한 인구 증가, 영양실조와 기아의 만연, 여자와 아이들의 욕구가 남자의 욕구에 종속됨, 전쟁의 참화, 만성적인 가난과 낭비적인 풍요라는 스캔들 따위의 문제가 또한 쌓여 있다.

이런 문제들은 잘 알려져 있으며, 우리는 여기에 관한 많은 문헌들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 나의 목적은 생태계의 위기와 연관된 신학적·윤리적 쟁점들을 강조하며, 그리고 교회와 대중운동 쪽에서 가능한 응답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 우리는 생태계의 문제에 대한 몇 가지 관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1. 생태계의 문제들에 대한 몇 가지 관점
 
성장모델은 수정되어야 한다. 생태계의 위기는 현대의 산업적·과학기술적 성장과 현대적 삶의 방식 때문에 야기되었다. 서구의 산업화 과정에서 나온, 경제발전의 한 패러다임인 성장모델이 거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막대한 자본을 사용하고 특히 재생 불가능한 천연자원들을 착취하는 과정이다. 이런 발전모델의 불가피한 결과는 자연과 인간 존재들의 가혹한 착취다. 생산되어야 할 물건의 종류와 사용되어야 할 과학기술의 형태에 대한 결정은 소비자 중심주의 경제의 요구에 의해 큰 영향을 받는데, 이 경제의 지배적인 성장 논리는 필요(need)가 아니라 탐욕(greed)이다.

이 성장모델은 상이한 부문들 사이에 불균형을 초래하며, 지배계급들의 이익을 위해 농촌과 자연환경에 대한 엄청난 규모의 착취를 눈감아 준다. 생태계의 균형을 파괴하는 이런 이익지향적 성장의 대부분은 미국과 유럽, 그리고 일본의 다국적기업들에 의해 음모가 꾸며지고 통제된다. 예를 들어, 일본의 다국적기업들은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그밖에 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산림과 천연자원을 닥치는 대로 파괴한다. 이로써 일본은 자신의 산림과 나무들은 별 문제없이 보존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일본을 둘러싸고 있는 지역의 나라들이 일본식의 삶의 방식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기 때문이다.

산업공해가 놀라울 정도로 증가되었다. 보팔에서의 가스 누출로 인한 끔찍한 참사는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 생생하다. 비료의 과다 사용은 농지를 황무지로 바꿔놓고 있으며 우리의 바다와 강들의 고기를 떼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식량과 에너지에 대한 인간의 수요는 자원들보다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는데, 사실 자원들은 감소되고 있다. 사람들이 환경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다음 세 가지 요인의 결과물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엄청난 세계 인구, 1인당 에너지 소비량, 그리고 각 사람이 불러일으키는 환경 파괴. 이 셋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더욱이 부자들의 낭비적인 생활방식과 천연자원의 무책임한 사용은 생태계에 특별히 부담을 주고 있다.

생태계와 발전을 주제로 인도에서 열린 한 협의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생태계의 위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데, 가난한 사람들과 주변부 사람들의 삶은 이 위기로 말미암아 더욱 빈궁해진다. 연료와 물 부족은 여자들의 삶에 더 무거운 짐이 된다. 부족들은 그들 자신의 땅에서 환경의 포로가 되고 만다. 여러 세대 동안 사회적·문화적 억압에 종속된 삶을 살아왔던 불가촉 천민들(Dalits)은 자연환경에 대한 무자비한 파괴로 말미암아 새로운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

만약 우리 인도인들이 “현재의 정부 정책들이 우리가 이런 형태의 발전을 수정하도록 도와줄 것인가 아닌가?”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그 대답은 “지배적인 발전 모형을 배척하고 생태학적으로 지속 가능한 형태의 발전을 채택하지 않는다면, 그 무엇도 현재의 위기를 역전시키지는 못할 것이다”가 될 것이다.

정의의 문제로서의 생태계의 위기. 우리는 생태계의 위기를 정의의 문제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것은 생태계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견해를 “정부 당국” 및 “전문가”의 견해와 구별해 주는 근본적인 관점이다. 위르겐 몰트만이 말했듯이, 정치적 사회적 정의는 생태계의 건강과 연관된다: “우리는 자연환경에 대한 정의가 없이는 사회정의를 달성하지 못할 것이다. 또 우리는 사회정의가 없이는 자연에 대한 정의를 달성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생태 정의(eco-justice)의 몇몇 차원들이 주변부 사람들의 투쟁의 경험을 통해 크게 부각되고 있다.

첫째, 경제적 착취와 환경 파괴 사이의 연관이다. 이것은 산림의 황폐화에서 명백해졌다. 욕심과 탐욕에 기인한 대규모 산림 파괴는 생활환경의 변화를 초래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발전”을 위해 그들의 거주지 밖으로 내몰린다. Kerala 지역의 어민들의 노동조합에서 준비한 한 보고서에서 그 전형적인 예를 볼 수 있다. 이 보고서는 살충제의 다량 살포로 인한 수질오염으로 많은 물고기들이 몹쓸 병에 걸린다는 것을, 그 결과 사람들은 물고기를 사지 않으려 하고 어촌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게 된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동시에 기계화된 저인망 어선들의 무분별한 사용은 모든 물고기의 생명을 위협하며, 전통적인 어민들은 그것으로 인한 손실에서 아직까지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둘째, 정의는 정의로운 관계들 속에서 실현된다. 불평등한 협력관계, 불평등한 지배 형태들은 불의한 것이다. 오늘날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대등한 파트너 관계가 아니라 지배와 착취의 관계임이 분명하다. 인간이 지구라는 혹성을 불공평하게 다루는 것은 생태계 위기의 주요 원인들 중의 하나다.

셋째, 불공평한 분배, 천연자원의 불공평하고 무절제한 사용은 심각한 정의의 문제다. 예를 들어, 미국인 하나가 자신의 생활방식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천연자원은 200-300명의 아시아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과 맞먹는다. 만약 북미인들의 이런 생활방식이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확대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해 보라.

넷째, 재생 불가능한 천연자원들의 급속한 고갈은 미래의 세대들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라는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만일 우리가 최고급 문화를 모든 나라 모든 지역의 사람들에게 퍼뜨린다면, 이 자원들에 가해지는 압력은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생태계의 균형을 혼란시키는 일이 없이는 바다 깊은 곳을 계속 개발하지 못한다는 경고를 받고 있다. 누군가는 깊은 바닷물의 역할을 우리 몸의 균형 유지를 도와주는 중이의 유동체(fluid in the middle ear)에 비유했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는 어떻게 하면 생명을 유지하면서도 생명을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천연자원을 사용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돌봄과 빈곤의 경감의 윤리. 서구에서 발전된 대로의 정의의 논리학에서는 권리, 규칙들,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존경을 강조한다. 그것은 아마도 오직 인간에게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권리와 의무의 균형점을 찾으려 한다. 우주가 정의로운 질서 속에 놓이려면, 우리는 돌봄의 윤리를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정의는 돌봄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룩될 수 없다. 성경에서는 동정(자비)을 드러내는 정의를 강조한다. 예언자들은 이해관계와 권리의 균형을 이루는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보호하는 정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상처받기 쉽고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일에는 우리의 연약하고 말없는 파트너인 지구를 보호하는 것도 아울러 포함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우리를 자연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라고 여길 수 없다. 우리는 스스로를 자연의 정원사, 관리인, 어머니와 아버지, 청지기, 피신탁인(trustees), 연인, 사제, 공동 창조자, 그리고 친구로 생각해야 한다. 이 자연, 이 하나의 세계는 우리에게 생명과 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을 주며, 아울러 자기 자신과 우리 인간 둘 다 계속해 존재할 수 있도록 점점 더 우리에게 의존하고 있다."

가난 역시 생태계 파괴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이 정의를 위한 투쟁을 통해 가난을 경감시키는 것은 생태학적 관심사에서 빠질 수 없다. 우리는 이 둘을 분리시키지 못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식량과 연료 같은 기본적 필요들을 얻기 위한 대안적 방법들을 갖지 못하는 한, 그들 역시 자기 주변의 어떠한 자연환경이든 무차별 파괴할 것이다.

생태계와 관련하여 정의는 포괄적 의미를 지닌다. 부정적으로 말하면, 정의는 경제적 착취와 천연자원의 불의하고 무절제한 사용에 반대한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정의는 인간의 책임성을 확증한다.

상호의존에 대한 새로운 의식. 생태계의 위기는 우리가 땅에 의존하고 있다는 새로운 인식을 우리의 의식 속에 깊이 새겨 주었다. 우리는 땅에 속한다. 우리는 땅과 공동운명체다. 이런 인식은 실재에 대한 현대적 견해에 날카로운 도전장을 던지며, 우리가 이전에 가졌던 가치 척도를 재평가할 것을 요구한다. 엄청난 침투력을 가진 서구 이성의 영향을 받아, 실재에 대한 현대의 인식은 기계론적 모델을 따른다. 그것은 기능적이며 이분법적이다: 정신/육체, 객체/주체, 이성/감정, 초자연적/자연적. 반면에 생태학적 견해는 유기적이어서 상호 연관과 상호 의존을 강조한다. 그것은 마틴 부버의 유명한 구별인 나-너, 그리고 나-그것의 관계에서 잘 포착된 세계관을 채택한다. 모든 실재는 공생적으로 결합된다.

샐리 맥패그(Sallie McFague)는 이 도전을 이렇게 표현했다: "생태학적 관점은, 우리는 가장 심원한 의미에서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닌'(not our own) 존재라고 주장한다. 우리 몸의 세포들로부터 우리 정신의 가장 섬세한 부분들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복잡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주에 속한다. 우리가 그 일부를 이루고 있는 생태계는 전체로서 하나이다. 바위와 파도, 대기와 흙, 식물들, 광물들, 그리고 인간은 역동적이며 상호 지지적인 방식으로 상호작용을 한다. 여기에서 원자론적 개인주의에 대한 모든 주장은 아무런 변호를 받을 수 없게 된다. 본질과 불변성, 그리고 완전이 아니라 관계와 상호 의존, 변화와 변형이 우리 시대를 위한 신학이 그 안에서 제 몫을 감당해야 할 범주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다소 도발적인 주장의 의미 깊숙이 들어갈 수는 없다. 이것은 너무도 인간 중심적 신학에 대한 비판을 훨씬 넘어 신학에서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까지도 요구하는 주장이다.

윤리에 대한 도전. 이러한 신학적 전환을 요구함과 아울러, 생태학적 관점은 윤리에 대한 우리의 전통 개념들에도 도전한다. 사실 상호 의존적 생태학적 모델은 인간 갱신의 근원이 될 수 있는, 윤리학의 새로운 방향을 제공할 수 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에게서 뭔가 배우기를 요청하신다. 생명의 존속에 필수적인 것은 지배와 조작의 가치들이 아니라 돌봄과 나눔의 가치들이다. 지배와 착취의 모형은 다만 자연의 고요한 죽음, 자연과 인간 모두의 생태학적 죽음을 낳을 뿐이다. 새로운 관점은 인간 상호간의, 그리고 자연과 인간 사이의 본질적 연관을 확증한다.

이런 본질적 연관과 피조 세계의 전체성 유지에 필수적인 가치 척도는 현대사회에서 지배적인 가치체계와 다르다. 우리는 생태학적 가치 척도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소비주의가 아니라 보전.
     *탐욕이 아니라 필요.
     *지배하는 힘이 아니라 가능케 하는(enabling) 힘.
     *자연의 착취가 아니라 피조 세계의 원상 보전.

우리는 이런 가치들을 양육하는 구조들을 건설하고 새로운 생활방식을 채택할 필요가 있다. 지배와 굴종을 뒷받침하는 가치들을 대체하기 위해 참된 상호 의존을 격려하는 사회적 메카니즘들과 정치적 구조들을 고안하는 것은 인류가 직면한 시급한 과제다.

통합적 실재(holistic reality)와 연대성의 윤리 혹은 공동사회 윤리를 강조하는 것은 인도의 문화와 종교들에서 대단히 뿌리가 깊다. 그러나 서구의 이성과 과학의 맹공격은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토착적 지혜의 차원들에 둔감하게 만들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이런 비전을 회복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구체적 형태와 관계들 속에서 표현하는 것이다.

생태계의 위기는 지속 가능한 형태의 발전을 선택할 것을 우리에게 촉구한다. 그것은 생태계의 정의를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에 헌신하라고 우리에게 도전한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법을 인식하게 하며, 이 방법은 우리의 신앙을 또렷하게 고백하는 데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2. 교회의 응답

몇몇 두드러진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인도의 교회들의 신학과 실천은 서구 선교사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왔다. 그 결과, 적어도 개신교인들 사이에서는 신앙과 생태계를 연관짓는 데는 거의 생각이 못 미쳤다. 실로 우리는 신학에 있어서 자연에 대한 그 어떤 논의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교회들이 우리의 자연환경에서 상징들과 관습들을 채택하는 일이 더러 있기는 했지만, 그것들이 교회의 사고나 실천의 주된 흐름 속에 통합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교회의 경력이 전적으로 음산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도전할 만한 잠재력을 지닌 대담한 실험과 응답들이 나름대로 이어져왔다. 우리는 그것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그 중 우리에게 유용하고 적절한 것을 가려낼 필요가 있다. 우리는 1990년 한국 서울에서 열렸던 “정의, 평화, 창조질서 보전”을 위한 세계대회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대회에서는 계약이라는 관점에서 창조질서 보전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확증했는데, 아마도 이것은 생태계 위기에 대한 교회의 응답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교회 역사상 최초의 일이 아니었나 싶다.

창조질서 보전과 관련해서 교회가 따를 수 있는 최소한 세 가지 모델이 있다.

1. 금욕주의 모델. 아마도 이것은 자연환경의 남용이 빚어낸 위기 및 생태계와 관련된 어떤 관심사들에 대한 가장 오래된 형태의 응답일 것이다. 이 모델에서 핵심적인 것은 최대한 절제된 삶이다. 탐욕은 생태계 문제의 근원으로 간주되며, 소박한 생활방식을 채택하는 것은 이 탐욕을 억제하는 길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슬로건은 금욕주의적 삶의 모델에 깊이 감명을 받은 현대인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추구하고 자신의 욕구를 최소한의 것만을 필요로 하는 금욕주의적 공동체들의 수준에 묶어두려는 그들의 시도에서 우리는 지구는 주님의 것이라는 메시지, 그리고 인간의 끝없는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지구를 무분별하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듣는다. 이것은 자연계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느끼지 못하는 낭비적인 생활 방식에 대한 강력한 항의다.

생태계에 대한 관심들과 관련된, 인도나 아시아의 특징적인 모델에서 우리는 이와 비슷한 응답을 발견한다. 힌두교의 탁발승들과 은둔자들의 암자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이 의식적으로 장려되는 중심지다. 우리는 카리다사(Kalidasa)의 사쿤타람(Sakuntalam)에 나오는 한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사쿤타라가 두시얀타 집안으로 시집을 가려고 캔버 무니의 암자를 떠나야 할 때, 그곳의 식물들과 기어다니는 곤충들, 또한 새들과 짐승들이 그녀와의 눈앞에 닥친 이별을 슬퍼한다. 그녀와 이제 헤어진다는 생각에 그것들의 마음은 저리도록 아프다.

교회에서, 이 모델은 자연과 조화된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을 사람들에게 환기시키는 도구 역할을 감당해왔다. 이 모델의 문제점은, 그것이 오직 개인적 생활방식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이 모델에 깃들인 가치들은 중요하지만, 이 가치들은 구조적 변화들에 영향을 미치는 데는 부적절하다. 또한 구조적 성격을 띤 관계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데도 부적절하다. 오늘날 우리는 개인들의 탐욕이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구조들 안에서 조직화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이 구조들은 자체의 논리에 따라 작용하면서 사회 속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일단의 권력들-이데올로기, 다국적기업들, 시장과 매체의 엄청난 위력-이 우리의 삶 전반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개인들은 고작해야 항의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뿐이다. 오직 집단행동과 결집된 대응력만이 이런 경향들의 흐름을 차단할 수 있다. 그렇지만 금욕주의 모델은 우리가 이런 노력을 하도록 고무시켜 줄 수 있으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2. 성례전적 모델. 삶과 삶의 모든 관계들은 예배 안에서의 하나님의 임재로 이끌려지며, 이 임재 안에서 그것들은 끊임없이 갱신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선물로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성찬식에서 잔은 제공되고 축복되고 나누어진다. 시편 148편은 우리 예배의 우주적 배경을 확증하는 아름다운 시다. 우리는 모든 피조 세계 앞에서, 또 피조 세계와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한다.

교회 전통에서, 사람은 묵상을 통해 자신의 우주적 존재를 깨닫는다. 우리는 우주적 힘을 우리 안에 흡수할 수 있다. 그러나 특히 개신교 전통에서, 우리는 갱신의 근원으로서의 이런 우주적 묵상의 전통을 소홀히 다루어왔다

이 모델의 문제점은 실천의 차원에서 드러난다.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성찬식의 의미는 그저 의식의 준수 정도에 머물러 있고, 따라서 성찬식은 이 세계에의 적극적인 참여의 방식으로 파악되지 못한다. 부서진 빵이 나눔의 명령으로 받아들여지는 일은 무척이나 드물다. 우리는 성찬식의 역동적인 성격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성찬식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와 재창조에 대해 개방적이 되도록 자극하고 격려한다.

3. 해방적 연대 모델. 이 모델에 따르면, 교회는 전체 피조 세계 중에서도 가장 약한 것과 연대해야만 한다. 이 현대적 모델은 성경에 뿌리박고 있다. 해방신학자들은 출애굽기와 다른 성경 구절들에 나오는 해방의 모티브를 강력하게 주장해왔다. 구원은 해방이다. 시급한 해방의 상황 때문에, 해방신학자들은 주로 정치 경제적 해방을 강조해왔다. 오늘날 우리가 확실히 해야 할 것은, 성경이 증언하는 해방은 피조 세계의 해방을 아울러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령의 사역인 자유는 전체 피조 세계의 갱신에까지 확장됨을 바울은 로마서에서 분명히 밝힌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은 우주 전체를 포괄한다(로마서 8:19-23). 역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는 우주적 해방을 향해 나아가는 변형의 과정에서 주도권을 쥐고 계신다(에베소 1:1-10; 골로새 1:15-20). 하나님의 자녀들의 내적인 해방에 대한 소망과 전체의 물질세계가 속박과 억압에서 해방되는 것에 대한 소망, 이 둘은 견고히 통일되어 있다. 성령의 사역은 이 땅의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것이다. 피조 세계로 번역되는 희랍어 크티시스(ktisis)에는 남자와 여자는 물론 모든 피조물이 포함된다. 악마적 세력들까지도 포함한다. 인간 삶의 모든 측면, 즉 역사, 문화, 그리고 자연환경의 해방을 추구하는 한에서만, 우리는 진실로 구원은 피조 세계의 온전함(wholeness)을 의미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출애굽에서의 해방을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해석하는 것과 로마서에서 피조 세계의 해방 과정 사이에는 뭔가 공통점이 있다. 전자는 억눌린 자들의 외침과 관련된다(출애굽 3:7 이하). 후자는 우리와 피조 세계 안에서의 신음과 진통에 대한 응답 속에 약속된다(로마서 8:22 이하).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의 외침을 들으셨고 또 그들 편에 서 계신다. 똑같은 방식으로, 이 땅의 갱신은 가난한 자들, 그리고 말을 못하는 피조물과 침묵한 자연의 외침에 대한 응답 속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용서하기로 결심하셨을 때, 그것은 “이 니느웨에는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어린이만 해도 십 이만이나 되고” 또 “가축도 많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동정심 때문이었다(요나 4:11). 하나님은 하늘을 치르는 고층빌딩들과 엄청난 규모의 슈퍼마켓들, 그리고 거대한 컴퓨터들을 위해 큰 도시들을 보존하는 데는 관심이 없으시다!

우리는 인간 상호간의 관계는 물론 인간과 자연(우주)과의 관계까지 포함하는 인간의 완전성에 대한 비전에로 부름을 받았다. 또한 우리는 가난한 자들과 약자들, 초라한 몰골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너무도 착취당하는 자연을 변형시키는 투쟁에로 부름을 받았다. 우리의 신앙에서 전도(mission)와 영성은 모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성경의 계약(covenant) 개념도 이 해방적 모델에 영향을 미쳤다. 역사의 틀 속에 있는 아브라함과의 계약, 그리고 인간의 구조들과 율법에 대한 하나님의 지속적인 돌보심과 참여를 확증하는 시내산 계약은 우리의 신학과 성경 해석에서 중대한 의미를 띠어왔다. 그러나 하나님이 노아와 맺으신 계약, 그리고 이 계약의 우주적 배경은 종종 망각된다. 하나님은 전체 인간과 자신의 모든 피조물에게 하신 약속을 충실히 지키신다.

세계교회협의회(WCC)가 1990년 개최한 “정의, 평화, 창조질서 보전”을 위한 세계대회에서는, 이 보다 넓은 의미의 계약에 모든 교회가 주목할 것을, 전체 피조 세계의 복지와 행복을 위한 하나님의 계약에 기초하여 교회 역시 하나의 계약을 맺을 것을 촉구했다. 대회는 교회가 하나님의 계약에 대한 그들의 응답을 계약공동체 안에서의 상호 헌신의 행동으로 구체화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이 구체적인 “계약의 행동들”을 위한 네 가지 영역이 제시되었다:

* 정의로운 경제질서 수립과 외국의 채무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일한다.
* 모든 나라와 민족들의 참된 안전을 위해 일한다.
* 손상되지 않은 피조 세계와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는 문화를 건설한다.
*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그리고 국가적 및 국제적 수준에서 일체의 인종차별과 차별 대우를 근절한다.

인도에서 교회들은 계약의 행동에 들어서서 주변부화된 사람들-불가촉 천민들, 부족들, 여성들-을 위해 싸우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 즉 정의로운 경제질서를 수립함은 물론 인도가 처한 상황에 비추어 지속 가능한 발전, 정의, 평화, 창조질서 보전을 위해 일해야 한다.

3. 새로운 영성

우리는 지구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진지하게 취급하는 새로운 형태의 영성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폭스(Matthew Fox)는 “창조의 영성”(creational spirituality)이라는 표현을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서구 교회들 사이에서의 새로운 운동을 주창하기도 했다. 이 영성의 핵심은 피조 세계 안에서의 하나님의 다양한 선물과 임재에 대한 깊은 인식이다:

"두려움, 그리고 이와 함께 놀라움이 우리의 출발점이다. 우리가 이 놀라운 우주의 일부라  는 두려움.... 이 두려움은 한 국가나 정당에 대한 거짓 신비주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    다. 그것은 우주 그 자체 안에서 우리가 공유하는 실존에 대한 깨달음에서 온다."

전통적으로 불교에서는 탐욕과 욕심을 속박의 근원으로 여긴다. 물질적 진보는 무욕(無慾)과 나눔과 적절히 조화되어야 한다. 피에리스(Aloysius Pieris) 신부에 따르면, "아시아의 상황에서는 '부'의 반대말은 가난이 아니라 욕심과 탐욕이다. 이것은 부를 반종교적인 것으로 만든다. 주된 관심사는 가난을 근절시키는 게 아니라 '맘몬'에 맞서는 투쟁이다. 이 맘몬은 모든 사람, 또 사람들 사이에서 뭔가 규정할 없는 힘으로 작용하여 물질적 부를 반인간적, 반종교적, 그리고 억압적인 것으로 만든다."

불행히도, 아시아의 영성은 개인들의 도덕적 행실 혹은 배타적 공동체의 형성, 즉 영적 귀족주의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이 둘 중 어떤 경우든, 참된 아시아적 영성의 핵심인 무소유와 나눔의 영성,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는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이것은 또한 가난한 사람들의 영성이기도 하다. 가난한 사람들은 땅과 바다와 친밀하며 또 공동체적 실존 방식에 매우 익숙하다는 데서 바로 이 영성이 샘솟는다. 그것은 투쟁의 한복판에서 그들을 지켜 준다. 폭력적 힘들의 맹공격을 받아 끊임없이 박살나면서도 투쟁을 포기하지 않는 이들 주변부화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이 영성 말고 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가 행동주의자의 삶을 살려고 애쓰면서도 이 사실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래서 이 사실로부터 뭔가 배우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오늘날 우리는 창조의 영성에 관한 성경의 통찰력을 표현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피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인간의 책임을 우리가 경축하고 배우도록 도와줄 성경연구 자료들, 예배와 기독교 교육이 늘 우리 곁에 있어야 한다. 피조 세계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강조하는 “청지기” 모델을 연구해야 한다. 많은 시편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한다. 예언자들은 피조 세계의 충만함으로서의 “샬롬”(shalom)에 대한 환상을 펼친다. 이 환상에서는 조화가 모든 존재의 두드러진 실존 방식이 된다. 야수와 인간이 함께 거주하고, 사자와 어린아이가 함께 뒹굴고, 칼은 보습으로 바뀐다. 사람들 사이에 피를 흘리는 것은 땅에 폭력을 범하는 것이라고 예언자 아모스는 주장한다. 이 모든 증언들이 사회적 불의와 생태계의 파괴 사이의 연관을 드러낸다.

우리는 우리 주님 그 자체에 귀기울여야 한다: 땅과 몹시도 밀착해 계신 그분은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에서 우리가 뭔가 배우기를 바라신다. 그분은 한 알의 씨앗처럼 싹트고 자라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다. 그분은 굶주린 자들에게 사랑의 응답을 하신다. 그분은 떡을 나누고 포도주를 쏟아 부으신다. 궁극적으로 그분이 성취하신 구원은 모든 것의 해방을 포함하며, 이로써 우리는 새 하늘 새 땅에 대한 소망을 품을 수 있다. 모든 것의 완전한 파멸을 언급하는 구절들이 성경에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것은 파멸 그 자체를 위한 게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인간 상호간에 그리고 자연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는 우리의 길을 거절하고 배척하도록 도우려는 의도에서 말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구절들을 운명론적 방식으로 읽으면 복음의 핵심적인 도전을 놓치게 된다.

4. 새로운 가치척도

신학과 영성에 대한 생태학적 관점은 우리의 현재의 가치체계를 재평가하고 새로운 가치 척도를 채택할 것을 우리에게 촉구한다. “나눔의 삶”(Sharing Life)에 관한 세계교회협의회의 한 문서는 이런 방면에서 몇 가지를 제안하는데, 그것들은 우리가 아래 사항에 헌신할 것을 요청한다:

  * 사회의 변두리로 내몰린 사람들을 우리와 동등한 파트너로서 모든 결정과 행동의 중심에 놓는 일.
  * 우리 자신을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조직화된 운동들과 일체화하는 것.
  * 상호적인 책임과 힘(power)을 누리는 것.

새로운 가치체계를 받아들임에 있어서 우리는 두 가지 결정적인 질문에서 제시되는 지침을 따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 누구의 말에 귀기울이고 있는가? 우리는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는가? 우리는 정책 입안자들, 정부 관료들, 그리고 전문가들의 말에 귀기울이고 있는가? 거주지에서 내쫓긴 가난한 부족민들의 말을 듣고 있는가? 어민들을 위한 투쟁에서, 우리는 수출시장과 다른 나라들과의 경쟁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재정 문제에 관한 한 도사임을 자부하는 사람들의 달콤한 말에 넋을 놓고 있지는 않은가?

가치 형성에서 기본적인 요소들 중의 하나는 힘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억압적인 힘이 연대적인 힘으로 변형되는 것을 목격한다. 예수께서 힘에 대한 두 적대적인 견해와 마주했다는 것을 신약성경은 분명히 보여준다: 자기 확대적인 힘, 그리고 남이 뭔가를 할 수 있게 해주는(enabling) 힘.

전자는 지배하고 조작하고 착취하는 힘이다. 이것은 독재자들의 힘이다. 이것은 열렬한 복음의 십자군의 힘일 수도 있다. 이것은 이익에 눈먼 산업주의자들, 그리고 자신에 반대하는 모든 것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는 정당 우두머리의 힘이다. 이것은 권위주의에 사로잡힌 주교들이나 성직자들의 힘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힘을 떠들썩하게 사용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교묘하게 사용한다. 일부는 이 힘을 악한 목적에 사용하고, 또 일부는 어쩌면 고귀한 목적을 위해 사용한다.

대조적으로, 남이 뭔가를 할 수 있도록 해주는 힘은 남을 섬기고 돌보는 힘, 사람들이 스스로 서도록 돕는 힘이다. 이 힘의 전략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예수께서 당하신 유혹들, 제자들과의 끊임없는 갈등, 최후의 만찬,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 이 모든 것에서 예수님은 남을 지배하고 조작하는 힘을 의식적으로 거절하셨다는 것을, 그리고 섬기고 봉사하며 우리의 연대를 견고하게 하는 힘을 기꺼이 받아들이셨다는 것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이런 연대적 가치들은 현실에 대한 생태학적 관점에서 필수적이다.

가치들은 생활방식, 관습과 구조들에서 표현된다. 우리가 획일적인 생활방식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천연자원을 무절제하고 낭비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신중하게 거절하는 것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선행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욕구에 한계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 소비자 중심주의 경제가 생산하고 시장(market)이 명령하는 모든 것을 굴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생태학적으로 책임적인 삶과 정반대다.

이런 맥락에서, 교회가 자기 재산을 책임적으로 사용하도록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중요하다. 재산이 늘어나는 것은 많은 도시 교회들이 쉽사리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생태학적으로 건전한 발전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말하는 그 어떤 지침도 따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여기에서 교회 건물의 미학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이 분야에서도 우리가 더 훌륭하게 처신할 수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교회 재산을 불리는 일에 신경을 곤두세움으로써, 우리는 생태학적으로 해로운 영리 추구를 재촉하는 논리와 가치체계를 승인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여러 해 전 우리는 뱅갈로 시내의 한복판에 위치한 성(聖) 마가 성당에서 이 문제를 건드렸다. 영리 추구에 안달이 난 많은 개발업자들은 교회에 속한 이 값비싼 땅에 눈독을 들였다. 우리는 목회자 협의회에 엄청난 압력을 가한 셈인데, 협의회에서는 건축가들과 개발업자들에게 조언을 구하기로 결정했다. 이 중대한 고비에서 나의 한 동료가 “건물의 신학”에 대해서도 토의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모임에 참석했던 회사 경영진과 유력한 사업가들은 그의 제안을 비웃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우리가 이런 행동에 돌입할 때 기독교인으로서 증언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그는 물었다. “이런 행동으로써 우리는 영리 추구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착취 구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지 않나요?” 이 논의에서 생태학적 차원이 명백히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오늘날 우리가 교회 재산의 “증식”을 논할 때 그의 이런 주장을 첨가해야만 할 것이다. 교회 재산을 불리는 일에 있어서도, 개발 곧 교회 재산의 증식 그 자체를 위해 가난한 사람들이 내쫓기는 일은 흔히 일어난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이런 문제들에 있어서도 우리는 이익에 눈먼 개발주의의 논리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듯하다는 것이다.

5. 모든 종교의 관심사

생태계에 대한 관심은 모든 종교인들의 공동의 대의(大義)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우리 모두의 가정인 지구를 보호하기 위해 우리는 모든 종교의 영적 자원들을 동원해야 한다. 유엔 환경 프로그램에서는 모든 종교가 함께 “환경 안식일/지구 휴식일”(Environment Sabbath/Earth Rest Day)을 지킬 것을 제안하고 있으며, 또한 불교와 기독교, 힌두교, 유대교, [힌두교의 일파인] 시크교, 그리고 이슬람교에서 끌어온 예배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다. 그것은 각 종교의 대표자들이 작성한 선언문으로 시작되는데, 그들 모두는 “자연계의 보전과 생태계의 조화를 위한 종교적 관심은 우리 공동의 유산이며 타고난 권리이며 의무”라는 데 동의한다. 각 종교의 기도문들 가운데 몇 개를 추려 보자:

            지고하신 신이시여,
            하늘과 대기에 평화가 깃들게 하소서.
            식물계와 산림에 평화가 깃들게 하소서.
            우주의 신들(cosmic powers)이 평화롭게 하소서.
            브라마에게 평화를 베푸소서.
            넘치도록 충만한 평화가 모든 곳에 깃들게 하소서.
            (아타르바베다; 힌두교 경전의 하나/역자 주)

            만물이 행복과 평화로 충만하게 하소서.
            살아있는 모든 것,
            약한 것이나 강한 것이나
            긴 것이나 짧은 것이나
            작은 것이나 중간 크기의 것이나
            천한 것이나 위대한 것이나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멀리 있는 것이나 가까이 있는 것이나
            이미 태어난 것이나 태어남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나,
            이 모든 것이 마음의 평화를 얻게 하소서.
            (불교의 기도)

            오 하나님! 만물을 지으신 이여!
            당신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물이 생명의 근원이다!
            우리가 뭔가 필요할 때면,
            당신은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나이다.
            우리가 아플 때면,
            당신은 우리에게 건강을 주시나이다.
            우리가 아무런 먹을 것이 없을 때면,
            당신은 은혜 가운데 먹을 것을 주시나이다.
            (이슬람교의 기도)

            찬양 받으소서, 나의 하나님!
            우리의 형제인 바람과 공기,
            그리고 흐리거나 청명한 모든 날씨를
            당신은 우리에게 베푸시나이다.
            이로써 당신은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시나이다.
            찬양 받으소서, 나의 하나님!
            우리를 지탱해주고 다스리며,
            온갖 다채로운 꽃들과 잎들을 가진
            열매를 낳는,
            나의 자매인 어머니 땅을 인하여.
            (아씨시의 성 프란시스)


신앙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이 모든 예배자료를 함께 나눌 수 있다. 사람들은 지구를 위한 기도에서 환경의 날(Environment Day)에 하나가 될 수 있다.

예배는 서로 다른 종교인들이 취할 수 있는 공동의 행동이다. 또한 모든 종교인은 산림의 황폐화, 그리고 호수와 강과 바다와 그 밖의 것들의 오염으로 말미암은 생태계 파괴를 막을 수 있을 정도로 굳게 결합할 수 있다. 모든 기독교인은 자기 지역의 다른 신앙을 가진 이들과 협력하여 환경보호를 위한 특정 과제들을 계획하고 실천에 옮기도록 도전을 받고 있다.  

* 이 글은 K.C. Abraham, A Theological Response to the Ecological Crisis, in: Ecotheology: Voices from South and North, ed., David G. Hallman, Orbis Books, Maryknoll, New York, 1994, pp.65-78의 完譯이다. 아브라함은 남아시아 신학연구소(SATHRI) 소장이며, 인도 뱅갈로의 연합 신학대학에서 신학과 윤리학을 강의하는 비상근 교수이기도 하다. 그는 남인도 교회의 안수장로로서 아시아 기독교협의회(CCA), 세계교회협의회(WCC), 그리고 그 밖의 에큐메니컬 단체의 많은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그는 제3세계 신학자 에큐메니컬 협회(EATWOT) 회장이기도 하다.

출처: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672


공부하자!

Posted by 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