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3. 11. 09:51





Samuel Rayan, S. J. 저
                          정연복 역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첫째 마당: 소중히 여겨야 할 것

   
 
   
 

땅은 소중하다. 땅은 하나님에게도, 그리고 우리에게도 소중하다. 땅이 소중하다는 것은 성경과 모든 부족민의 전통의 핵심 증언이다. 하나님은 땅의 가치와 경이로움을 제대로 평가한 첫 번째 분이셨다. "하나님께서는 마른 땅을 뭍이라,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 부르셨다. 하나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 1:10).

"이리하여 땅에는 푸른 움이 돋아났다. 낟알을 내는 온갖 풀과 씨 있는 온갖 과일나무가 돋아났다. 하나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 1:12).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만드신 두 큰 빛 가운데서 더 큰 빛은 낮을 다스리게 하시고 작은 빛은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또 별도 만드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빛나는 것들을 하늘 창공에 걸어 놓고 땅을 비추게 하셨다 … 하나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 1:16-18).

"하나님께서는 '바다에는 고기가 생겨 우글거리고 땅 위 하늘 창공 아래에는 새들이 생겨 날아다녀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큰 물고기와 물 속에서 우글거리는 온갖 고기와 날아다니는 온갖 새를 지어내셨다. 하나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 1:20-21).

"하나님께서 '땅은 온갖 동물을 내어라! 온갖 집짐승과 길짐승과 들짐승을 내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온갖 들짐승과 집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길짐승을 만드셨다. 하나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 1:24-25). "이렇게 만드신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 1:31).

땅은 하나님과 우리에게 소중하다. 땅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 땅은 유일무이한 것이요, 땅과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땅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답다. 한 무명의 땅의 연인은 우리를 땅에 대한 명상으로 초대한다: 만약 땅의 직경이 겨우 몇 피트밖에 되지 않는다면, 그래서 들판 어딘가에서 몇 피트 상공을 떠돈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보기 위해 도처에서 몰려올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 주위를 걸어다니면서 그것의 큰 물웅덩이들과 작은 물웅덩이들, 그리고 그 웅덩이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고 놀랄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 위에 있는 돌기들과 그것 안에 있는 구멍들,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매우 얇은 가스층, 그리고 이 가스 위를 떠도는 물을 보고 놀랄 것이다.

사람들은 둥근 공 모양의 표면 위를 이리저리 걸어다니는 모든 것들, 그리고 물 속에 사는 모든 것을 보고 놀랄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더없이 소중하다고 선언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과 같은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또 사람들은 그것이 상하지 않도록 보호하려 할 것이다. 이 둥근 공 모양의 땅은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위대한 경이로움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사방에서 몰려와 그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보면서 마음의 상처를 달래고, 그것에 관한 지식을 얻고, 그것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어떻게 이런 것이 존재할 수 있는지 놀라워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하고 목숨 바쳐 보호하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것이 없이는 그들의 생명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854년 인디언 추장인 시애틀(Seattle)은, 부족민들은 땅을 보고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는 신적인 능력을 물려받았음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이 땅의 모든 부분이 우리 부족민에게는 신성하다. 빛나는 소나무 잎들, 모래가 쌓인 해안, 울창한 숲 속의 모든 안개, 투명하고 콧노래를 부르는 곤충은 우리 부족민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 신성하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 아름다운 땅을 결코 잊지 못한다. 왜냐하면 땅은 아메리카 인디언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땅의 일부분이며 땅은 우리의 일부분이다. 향기로운 꽃은 우리의 자매요 …, 우리 선조들의 재(ashes)는 신성하다. 그들의 무덤은 거룩한 땅이요, 마찬가지로 이 언덕들, 이 나무들, 땅의 이 부분도 우리에게는 신성하다 … 공기는 아메리카 인디언에게 소중하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가 같은 숨을 쉬고 있기 때문이다. 공기는 땅의 정령을 땅이 지지해주는 모든 생명체와 함께 나눈다. 우리의 하나님은 동일한 하나님이다. 이 땅은 그분에게 소중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땅을 경멸하거나, 남용하거나, 낭비하거나, 정복하거나, 약탈하거나, 사유화하거나, 파괴시킬 수 없다. 땅은 우리의 존경과 애정을 받아야할 가치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땅을 건강하고 온전하고 아름다운 상태로 물려주어야 한다. 땅은 그들에게 생명의 근원과 토대가 되어야 한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처럼, 땅은 그들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의 성례전과 기본적인 은총이 되어야 한다.

땅은 하나님께서 인류 및 모든 생물과 함께 나누시는 생명과 사랑의 모든 은총을 요약하는 상징이다. 땅은 사물이나 대상이 아니라 관계적인 현실(relational reality), 즉 마음에서 마음으로 생명과 사랑을 역동적으로 중재하면서 활기 넘치게 생존해 있는 하나의 현실이다.

땅은 빵이나 쌀과 같은 친교요, 모든 존재의 통일성(togetherness)의 경축이다. 그러므로 개인이나 집단은 땅과 땅의 모든 자원을 약탈하고 독점하는 일을 피하고 예방해야 한다. 땅과 땅의 모든 자원은 그 어디에서나 인류에게, 모든 사람에게 공동으로 속하는 것으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 하나님 백성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가능성에 봉사하려는 땅의 자유를 보장하는 한에서만, 기본적인 자원들 그 이상의 것에 대한 분배가 정당화될 수 있다. 땅을 포로로 사로잡고 또 땅이 땅의 배고픈 자녀에게 생명의 우유를 가지고 신속하게 다가서는 것을 가로막는 (땅에 대한) 배타적인 사적 소유권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러므로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은 땅이 몇 사람의 수중에 집중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땅의 본성 및 목적에 어긋나는 불의한 것으로 간주했다. 땅은 언제나 땅 본래의 친교적인 성격을 유지해야 한다 : 하나님과의 친교, 그리고 우리 인간들 사이에서의 거룩한 친교(holy communion). 땅은 언제나 성찬식의 신비를 유지해야 한다. 즉 땅은 이 세계의 생명을 위해 베풀어진 하나님의 빵이요, 하나님의 몸이다. 많은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이 취했던 자세를 우리는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1. 초기 교부들의 토지 소유권에 대한 교리와 가르침의 기초는 인간의 평등이었다. 평등은 다음에서 흘러나온다: (1) 하나님의 마음에 뿌리내리고 있는 우리의 공통된 기원(또한 우리는 땅의 마음과 자궁을 여기에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2) 우리의 공통된 성격(우리 모두는 동일한 기본적 욕구들과 사랑할 수 있는 동일한 힘을 갖고 있다); (3) 우리의 공통된 운명(우리 모두는 하나님 안에서의 삶과 인간 상호간의 삶에로 부름을 받고 있다).

이로써 우리 모두는 창조주의 평등한 허락을 받고 있다. 이 평등한 권리들을 가지고 우리 모두는 공기를 호흡하고, 대지를 걷고, 고귀한 인간 실존에 필요한 땅과 그 밖의 생산적 요소들을 사용한다. 우리는 동일한 역사를 공유한다. 우리는 동일한 대지를 공유한다. 공동의 대지를 사용할 수 있는 우리의 권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권리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평등한 권리에 의해서만 제한된다. 인간의 기본적인 평등은 하나님의 땅이 집중화되고 사유화되는 것을 금지한다.

2. 땅은 이 땅 위에 사는 하나님의 가족 전체를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것이다. 땅은 교부들이 공동의 재화(ta koina)라고 부르는 것, 즉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 예정된 것이다. 땅은 누군가의 노동의 산물(ta idia)이 아니다. 교부들은 공동의 하늘, 공동의 빛, 공동의 우주에 대해 말한다. 그들에게 있어 땅과 공기, 물은 "생명의 근원들"(causes of life)이다. 그 누구도 이 생명의 근원을 박탈할 수 없고, 그 누구도 이 생명의 근원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도록 강요당할 수 없다.

3.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사적인 소유권, 다른 사람을 무소유와 가난한 상태에 머물도록 하는 땅의 집중과 부의 축적은 사기와 강탈, 약탈과 근본적인 불의를 내포한다. 가난한 사람 한복판에서 부자는 도둑놈이다. 재산을 상속하는 것은 훔친 물건을 축적하고 전달하는 것이다. 이 훔친 물건을 다시금 공동체로 복귀시키는 것은 정의의 요구다.

4. 교부들이 정죄하는 것은 사적 소유권의 남용만이 아니다. 그들은 사적 소유권 제도까지를 문제삼는다. 그들은 모든 사유재산을 탐욕, 폭력, 박탈, 약탈, 그리고 도둑질과 동일시한다. 그들에 따르면, 사유재산은 온갖 불화와 갈등,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이 아니라 인간의 법, 황제의 법에 불과하다. 그것은 땅이라는 직물(fabric) 안에 분명히 새겨진 하나님의 목적과 모순된다.

5. 초기 기독교 저술가들은 사적 소유권을 우상숭배로 여겨 배척한다. 사적 소유권은 탐욕을 내포하고 있는데, 바울은 이 탐욕을 우상숭배와 동일시한다. 독점적 권리에 대한 사적 소유권의 주장은 땅과 땅의 온갖 풍요로운 것들에 대해 갖고 계신 오직 하나님만의 절대적 권리에 맞서는 행위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부를 존중하는 한에서만 우상숭배를 피할 수 있다. 진정한 의미의 부는 한 형제요 자매인 우리 모두, 우리의 모든 공동체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땅과 부는 우정과 함께 나누는 생명과 삶의 매개체다.

6. 사도행전 2장과 4장, 또 떡을 떼는 일에 있어 평등의 실천에 대한 본문들(고전 10장, 11장)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초기 교부들이 열렬히 추구했던 것은 그런 충족과 공동체였다.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재화를 공동으로 소유하라는 종교적 명령들이 교회에 출현한 것은, 친구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본래적인 자기이해가 지배계급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질식당하던 때, 그리하여 교회 자체가 로마의 사회적 현실의 모습을 따라 개조되어가던 때였다. 이런 움직임들은 기독교 초기의 공동사회적(communitarian) 비전에 대한 어떤 기억을 지켜가려는, 또 "너희-하나님의 백성들-사이에 가난한 사람이 없도록 하여라"(신 15:4)는 신명기적 권고를 새롭게 인식하려는 시도들이었다. 공동 소유권의 이상은 교회에서 복음적 가치로서 늘 높이 평가받아왔다.

복음적인 것이 많은 사람, 혹은 마을과 도시, 국가와 세계가 아니라 일부 사람에게만 유익한 것으로 공공연하게 주장되는 오늘의 현실에서, 그 이상은 아마도 우리의 신학적·영적 애매모호성을 재는 척도가 될 것이다. 땅은 우리가 우리의 뿌리로 되돌아갈 것을, 그리하여 거기에서부터 하나님과 땅의 새로운 꿈의 공동체를 꽃피울 것을 요구한다. 


둘째 마당: 땅의 상품화, 땅과 인구비율의 전 세계적 불균형, 생태계의 위기

오늘날 땅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있어 세 가지 요인이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이 요인들은 땅과 땅의 신비에 대한 성경적·기독교적 견해와 정면으로 모순된다:

1. 그 어떤 진정한 휴머니즘이나 진정한 종교적 관점에서도, 땅은 그저 우리가 소유하고 처분할 수 있는 하나의 "사물"(a thing)로 간주되거나 취급되지 않을 것이다. 땅은 생명,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에 대한 우리의 예배 및 경험과 너무나도 밀접히 연관되어 있으므로 결코 하나의 상품으로 다루어질 수 없다.

우리는 고대의 부족민 전통에서 여러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태평양 연안의 민족들은, 우리가 땅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땅이 우리를 소유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늘 상기시켜왔다. "나는 여러분이 땅 어머니(Earth Mother)의 힘을 얻기 위해 우리 부족의 거룩한 곳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다 … 우리는 땅을 우리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우리는 그녀를 소유할 수 없다. 그녀가 우리를 소유한다."

땅은 소유물이 아니다. 땅은 사람들이다(land is human beings). 벨록(Hilaire Belloc)은 인간을 "땅의 동물"이라고 정의했다. 땅은 절대로 매매와 가격 흥정의 대상인 시장의 한 상품이 될 수 없다. 땅은 우리의 몸이며 우리 자신, 혹은 우리 어머니의 몸이며 어머니 자신, 혹은 하나님의 성례전(sacraments)이다. 땅은 신성하다. 앞서 인용했던 시애틀 추장의 연설을 더 들어보자:

"워싱턴의 최고 우두머리께서 우리의 땅을 자신이 사기 원한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 어떻게 당신네는 하늘, 또 땅의 따스한 기운을 사거나 팔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생각은 우리에게는 낯설다. 우리가 대기의 신선함과 물의 활기 띤 광채를 소유한 것이 아닐진대, 어떻게 당신들은 그것들을 살 수 있단 말인가? … 우리는 땅의 일부분이며 땅은 우리의 일부분이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영적 깊이와 문화적 세련됨은 이런 정도에까지 이른다. 모든 이민자는 이들의 목소리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는 게 좋을 것이다. "백인은 이해하지 못한다 … 지구는 백인의 형제가 아니라 적이다 … 백인은 땅을 돌보지 않는다 … 백인은 자기 어머니인 땅과 형제인 하늘을 양이나 빛나는 염주알처럼 사고 팔고 약탈해도 좋은 물건인 양 다룬다"는 것이 바로 이들 원주민들의 뼈아픈 체험이다. 백인 대표자들이 인디언의 땅을 양도받는 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왔을 때, 블랙피트 부족의 추장은 이렇게 거절했다:

"우리의 땅은 당신네의 돈보다 더 소중하다 … 햇빛이 빛나고 물이 흐르는 한, 이 땅은 여기에 계속 존재하여 사람과 동물에게 생명을 줄 것이다. 우리는 사람과 동물의 생명을 팔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을 팔 수가 없다. 이 땅은 위대한 영(the Great Spirit)에 의해 우리를 위해 여기에 놓여졌고 우리는 그것을 팔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소가 고개를 끄덕이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당신네의 돈을 세고 또 그 돈을 불태워버릴 수 있다. 그러나 오직 위대한 영만이 이 평원의 무수한 모래알과 풀잎을 셀 수 있다. 당신들에 대한 선물로서, 우리는 당신네가 가질 수 있는, 우리가 갖고 있는 그 어떤 것도 당신들에게 줄 용의가 있다. 그러나 땅만은 절대로 안 된다."

모든 원시사회가 공유하는 이런 세계관에서는, 땅은 하나님의 가족, 우리의 자매와 어머니, 생명과 예배 안에서의 우리의 파트너, 그리고 우리와 더불어 공동의 순례자다. 이 땅을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근본적인 이탈이다. 지파동맹체 시대(tribal period)의 이스라엘의 땅에 대한 견해도 이와 유사했다. 이런 초기의 신념들의 주목할 만한 흔적들이 성경의 최종적인 편집 과정에서도 소중하게 간직되었다. 예를 들어, 땅을 영원히 팔아 넘기는 것은 금지된다. 왜? 그것은 많은 사람의 땅이 몇몇 지주의 손에 집중화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땅은 아주 팔아 넘기는 것이 아니다. 땅은 내 것이요, 너희는 나에게 몸 붙여 사는 식객에 불과하다"(레 25:23).

만약 내 추론이 옳다면, 결론은 이런 식으로 나야 할 것이다: 땅은 절대로 사거나 팔 수 없다. 일단 팔린 땅도 언제든지 되살 수 있었다. 즉 땅의 원래 주인이나 그의 친척들이 돈을 되돌려주면, 땅을 산 사람은 땅을 되돌려주어야 했다. 땅을 산 사람은 땅을 계속 소유할 아무런 권리도 없었다(레 25장; 신 15장). 땅을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시킴으로써 땅을 모독하는 행위는 계급사회의 도래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런 행위는 고대 로마에서 일상적 관행이 되었고, 봉건사회로 전달된 로마의 법은 고대 문화에 대한 식민지 정복의 여러 세기를 거치는 동안 자본주의의 지배적 정신으로서 전 세계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제 땅은 상업적 문화의 노골적인 폭력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성례전으로서의, 그리고 우리의 함께 나누는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본래적인 존엄성을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

2. 땅에 대한 기독교적 전망과 모순되는 두 번째로 중요한 요인은, 지구 표면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분포가 현재 전 세계적으로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을 신학적 문제로 제기하는 티사 발라수리야는 이런 불평등한 분포에서 "세계체제의 주된 결점들과 불의들 중의 하나"를 목격한다. 1500-1950년에 이르는 유럽의 팽창은 사람들이 거주하기에 알맞은 땅들의 대부분을 유럽인이 점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서유럽인들은 북미와 중미, 남미, 호주, 뉴질랜드, 그리고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들을 점령했다. 그들은 중국과 일본, 그리고 태국을 제외한 아시아 전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동유럽의 한 민족인 러시아인들은 태평양과 중국과의 경계선까지 그들의 제국을 넓혔다. 유럽인들은 "지구의 거대한 열린 공간들 중의 대부분"을 제것으로 만들었으며, 유럽과 미국 국민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민족을 영원히 지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하나의 세계체제를 건설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세계는 "백인 민족주의(white-racist) 세계체제"이다.

불균형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전체 인류의 40퍼센트를 구성하는 인도와 중국, 일본의 인구는 지구 표면의 10퍼센트만을 차지하고 있다. 반면에 세계인구의 겨우 1퍼센트를 구성하는 캐나다와 호주와 뉴질랜드는 지구 표면의 13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보다 아주 조금밖에 작지 않은 브라질은 중국 인구의 겨우 10분의 1만을 먹여 살린다. 볼리비아는 일본보다 세 배나 큰데, 일본이 1억 1,500만의 인구를 가진 것과 비교하여 겨우 5백만 인구밖에 안 된다. 뉴질랜드 면적의 겨우 반밖에 되지 않는 방글라데시는 뉴질랜드의 25배나 되는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 북미에서는 땅 대 농업노동자의 비율이 78.4대 1임에 반하여, 아시아와 태평양 연안 국가들에서는 그 비율이 0.98대 1이다. 중국과 다른 중앙 집중화된 경제지역들에서는 그 비율이 훨씬 더 낮아져 0.51대 1이다.

이런 인위적으로 야기된 부당한 불균형에는 인종 차별주의 차원 또한 담겨 있다: 전체 세계체제는 일종의 인종차별주의에 기초한다 … 서로 상이한 인종집단들은 그들이 그 안에서 살아야만 하는 개별적이고 불평등한 "보전자"(preser-ves), 즉 땅을 할당받는다. 황인종은 중국과 일본, 그리고 인접한 섬들을 갖고 있다. 흑인은 아프리카를 갖고 있다.

갈색 인종에게는 인도, 파키스탄, 그리고 동남 아시아가 할당되어 있다. 세계의 나머지 지역들은 주로 백인들 몫이다. 흑인과 황인종, 혹은 갈색 인종이 백인 지역에 자유롭게 이민을 갈 수 있다고는 해도, 그것은 주로 백인을 위한 노예 혹은 값싼 노동자로서 그러할 뿐이었다.

이런 현상은 오늘까지도 계속된다. 호주는 백인이 자기네 땅에 들어와 살도록 광고까지 하며 짐바브웨에서 25만의 백인을 기꺼이 맞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2만5천의 아시아인은 마지못해 받아들이며, 그것도 나름대로 기술과 교육과 재정적 여력이 있는 사람만 받아들인다. "영토가 넓은 그 어느 나라도, 세계인구의 재정착(resettlement)을 기본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인종차별주의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비극적인 사실들은 바로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다. "영토에 비해 인구가 적은 모든 나라들, 즉 미국, 소련, 캐나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호주, 뉴질랜드는 아시아인을 차별대우하는 이민법을 갖고 있다." 이런 전 세계적 불균형과 인구가 적은 나라들의 이민정책은 "인간의 발전과 정의를 가로막는 가장 치명적인 장애물들 중 하나"이다. 따라서 여러 민족에게 땅을 평화롭게 재분배할 수 있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 기본적으로 요구된다.

이것은 세계적인 협의사항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인류의 창조적 성장이 땅의 올바른 사용 및 변형과 관계 맺을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이것은 오염과 쓰레기를 줄일 것이다. 왜? "북미와 호주에 현재 거주하고 있는 자들과는 달리, 제3세계 사람들은 땅을 돌보는 오랜 전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세계발전의 문제들을 다루는 그 어느 국제기구도 문제의 이 측면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지 않다 … 현재의 영토분포는 절대로 손을 댈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땅을 이런 식으로 다루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땅의 자녀들 모두에게 거주할 집을 주고, 또 그들을 알맞고 바르게 양육하고 싶어하는 땅의 소명과 갈망과 같은 근본적인 실제들을 간과하는 것이다.

3. 땅과 자연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 심지어 인간적 관점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세 번째 요인은 생태계의 위기다. 이것은 단순히 기독교적인, 혹은 그 밖의 견해들과 신학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것은 이 지구라고 하는 지극히 작은 행성 위에서의 인간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다. 오늘날 지구는 산업과 농업, 대중매체의 모든 면에 있어 이익 지향적 과학적-기술적 현대문화의 낭비적이고 방탕하고 약탈적인 관행들로 말미암아 오염되고 파괴되어가고 있다. 생명의 집으로서의 지구의 본래적인 위치와 의미와 역사가 죽음의 위협 아래 놓여 있다. 위기의 징후들은 사방에 널려 있다. 소중한 자원들이 무기경쟁, 핵무기 축적, "별들의 전쟁"(Star Wars), 그리고 이와 유사한 미친 짓거리들 같은 파괴적이고 해로운 목적에 헛되이 사용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지구와 지구의 생명을 부분적으로, 전적으로, 혹은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파괴할 수 있으며 또 지금까지 파괴해왔다. 핵 폐기물, 방사능 폐기물, 그리고 그밖에 치명적으로 유독한 폐기물을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바다나 섬, 대륙에 마구 쏟아 붓고 있다. 공장에서 나오는 오염물질 및 이로 말미암은 산성비와 함께, 이것들은 식물과 새, 짐승과 물고기, 호수와 강, 인간에게 대규모의 질병과 죽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독성 연기로 자욱한 대부분의 도시의 대기는 건강과 생명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몇 개의 지명만 거론해보더라도, 쓰리-마일 섬, 비키니 아톨, 보팔과 체르노빌은 우리의 경제적 및 정치적 체제라고 하는 현대의 몰록(Moloch)이 요구하는 인간적 희생물의 상징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그릇 선택한 방향으로 계속 돌진할 때, 땅과 우리에게 어떤 일이 예정되어 있는지 알리는 불길한 경고다.

화학비료와 살충제는 토양을 오염시키고 지력을 떨어뜨린다. 그것들의 과도한 사용은 이 땅과 땅의 생물의 건강에 크나큰 재앙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물은 남용되거나 낭비되고 있으며, 지하수의 근원은 날로 메말라가고 있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 축적과 일회용 소비자중심주의 문화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마구 열대림을 베는 것은 지구 온도 상승, 기상 조건의 급격한 변화, 그리고 오존층 파괴를 야기한다. 이미 이것들은 지구의 울창한 산림과 비옥한 들판을 사막으로 전락시키는 위협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이런 문화체제 안에서, 환경의 파괴는 여러 형태의 사회적 오염들과 병행하여 일어나고 있다. 실업의 증가, 음식과 물 같은 인간의 기본 욕구들을 채우기 위해 엄청난 수의 대중이 몇몇 권력의 중심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 광범위하고 심화된 상품화된 삶의 분위기 속에서 가난한 사람들(특히 여성과 아이들)이 착취당하고 날로 지위가 격하됨, 사람들이 점차적으로 자연과의 조용한 친교로부터 떨어져나가고, 그들의 상호 관계가 약화되며 기계화되고, 시와 신비에 대한 그들의 소박하고 필수적인 감정이 천박한 실용주의나 지나친 탐욕 때문에 메말라질 때 강렬하게 느껴지는 고독감과 무의미성의 고통 등이 대표적인 사회적 오염이다. 가장 큰 오염은, 이제 기계가 땅과 인간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 싱싱한 생명과 창조적인 상상력의 근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결국 기계가 인간을 다스리게 된 것이다. 파괴적인 과학기술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는 인간과 땅의 느리거나 신속한 죽음을 암시해준다.

<땅을 위한 진혼곡>이라는 우리 시대의 시편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생명의 어머니이며 집인 땅을 약탈하고 파괴시키는 광기에 맞서는 날카롭고도 강력한 항의다.

땅이여,
아직 죽은 것은 아니지만
막 숨이 넘어가려고 하는
그대에게 평화 있어라.

여기 한 노래가 있다.
그대와 나의 장례를 위하여
내 가슴속에 휘갈겨 쓴 노래.

독성이 서린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내일 그대의 몸은 차갑고 무감각하게 되리니,
그때에는 아무것도 이 땅에 남지 않으리라.
나 또한 이 땅에 존재하지 못하리라.
그리하여 그대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혹은 그대의 잿빛 얼굴에
한 방울 눈물을 떨구기 위하여,
막 숨이 넘어가려고 하는 그대,
땅을 위하여 내 이 노래를 휘갈겨 쓰노라.
그대는 수없이 많은
비사교적인 자녀들을 낳았지.
그대는 그들이 서로 잡아먹는 것을 보며
남몰래 슬픔의 눈물을 흘렸지.
언제부터인가 그들은
그대를 잡아먹기 시작했지.
그러나 그대, 모든 것을 참아내는 그대는
아무런 저항이나 방해의 몸짓도 하지 않았지.
그대의 품안에서 젖을 빨며
포동포동 살이 오른 그들은
새로운 갈증을 느꼈지.
그대의 신성한 가슴의 피를 빨아먹고픈
그들의 마지막 갈증을.
그들은 태양이 사랑하는 신부에게 입혀준
녹색 옷을 그대에게서 벗겨버렸지.
그대의 여린 살 속으로
그들은 날카로운 손톱자국을 새기고,
그대의 상처에서 용솟음치는
피를 빨아먹었지.
그대 자신의 자녀의 죄와 수치라는
무거운 짐 아래,
약탈당하고 추방당하고
머리가 벗겨지고 등이 굽은 그대.
이제 그대는 우주 속에서
홀로 방황하노라.
땅이여, 아직은 죽지 않았지만
막 숨이 넘어가고 있는 땅이여,
그대에게 평화 있어라.


셋째 마당: 들의 꽃과 하늘의 새를 보라

최근 들어 영적·신학적 작가들은 우리를 회심에로 부르면서 우리가 멈추어 서서 끊임없이 고갈되고 있는 땅과 땅의 충만한 것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재고하고 새롭게 느껴볼 것을 요구해 왔다. 자연에 대한 우리의 무책임한 접근방법은 이제 종말을 고해야 한다. 하나님의 침묵하는 피조물에 대한 전통적인 “정통적 기독교적 오만”은 이제 포기되어야 한다. "땅 자체의 법칙과 요구, 리듬과 한계에 대한 고려 없이 땅을 지배하기 원하는 것은 자연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결핍을 말해주는 명백한 증거이다"라고 말하는 티사 발라수리야의 주장은 참으로 옳다. "땅을 정복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또한 "땅을 돌보아라"고도 말씀하셨다(창 1:28; 2:15).

우리 자신에게서 물질에 대한 모든 비열한 경멸을 제거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존재하게 하는 것에 대해 존경심을 품은 관심을 발전시키는 일은 꼭 필요하다. 자연에 대한 시적(poetic) 접근은 환원주의적인 과학적·기술적 접근과 균형을 이루면서 과학적·기술적 접근의 잘못된 점들을 교정해주어야 한다. 예수의 발자취를 쫓아 꽃을 바라보고 새를 명상하면서 신비와 대면하는 것, 성 프랜시스와 더불어 모든 피조물의 평등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인간, 해와 달, 물과 불을 하나의 무지개 현실(a single rainbow reality)로 통합시키는 자매성을 깨닫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모든 형태의 생명에 담긴 신비와 생명의 담지자로서의 땅의 신비에 대한 느낌도 중요하다. 이 신비는 궁극적인 신비, 즉 모든 실재의 자궁과 결합되어 있다.

이제 우리는 전통적인 저 세상적(other-worldly) 및 이 세상적(inner-worldly) 금욕주의를 넘어 세상을 위하는(pro-worldly) 금욕주의라는 새로운 형태의 금욕주의의 필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이 새로운 형태의 금욕주의는 땅과 사람들, 하나님이 벌이는 흥겨운 "잔치"(conviviality)로 펼쳐진다. 이 잔치에서, 땅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세상적(terrestrial) 가족과 친구들을 위해 차리신 인류 공동의 식탁으로 인식된다. 우리는 경쟁적인 쟁탈전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양육하고 보호하는 즐거운 친교 가운데 이 식탁 주위에 함께 모인다. 이런 잔치는 "땅과 생명에 필수적인 자원들의 불균형한 분배"를 유지시키는, 그리고 "생태계의 섬세한 내적 관계를 파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불의한 사회제도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거절을 요구한다.

만약 땅의 직경이 겨우 몇 피트밖에 안 된다면 …
사람들은 도처에서 몰려와 그 광경을 보고 놀랄 테지 …
사람들은 땅 주위를 걸어다닐 거야 …
사람들은 땅을 사랑하고
목숨 바쳐 땅을 보호할 거야.
왜냐하면, 어떤 식으로든
그들은 알게 될 거니까 …
땅이 없이는,
그들 자신의 활기 또한
존재할 수 없으리란 걸.
만약 땅의 직경이
겨우 몇 피트밖에 안 된다면.


                                                                                                                       

출처 :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399
입력 : 2008년 01월 02일 (수) 12:47:32 당당뉴스

이상적인 이야기일까?
재산과 부의 상징인 토지.
세상에게 이 말이 통할까!
나는 공감하고,
나는 감동받았지만,
나에게 땅이 있다면 공감할 수 있을까?
나에게 공장이 있다면 공감할 수 있을까?
내가 꿈꾸고, 생각하는 것이 파라다이스가 아니였으면 좋겠다.




Posted by 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