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2. 6. 01:01

Good evening! Ladies and Gentlemen!


I'm happy to be here. My name is... Eunkee Ban, as you know. I'm Korean.


How long have I been living here? As of today, I have been living here since 11th of July . So Exactly 5 months. I'd like to celebrate. So I'd like to sing a Korean song with you. Ladies and gentleman, are you ready? Shall we sing a song, together?


sing a song




When I have a new experience of something, What do I do? I usually take photos of it. So I'd like to introduce my picture. Where was this picture taken? Have you ever seen a shepherd and sheep? I took a trip in India. I had never seen a shepherd and sheep until I went to the Himalayas. There was a rugged mountain road. If I lost my footing, I would fall off the path. And I needed oxygen. The oxygen content of the air was lower than a normal area. I had to take a rest at the mountain top. It was beautiful. Wow! Wow! My eyes fell on the shepherd and sheep. Even though paths were rugged. They seemed to me just to be taking a light walk. It was a fantastic combination. The sheep were following the shepherd unconditionally. I had been thinking "it's not just a path, It's dangerous." But the sheep just followed after the shepherd. The scene reminded me about God and my relationship.


I didn't use to like to follow Jesus. I didn't use to like to think about Jesus. I wanted to run away from God`s way. I used to be the problem student at Methodist Theological University. But God showed his love in many ways. God always protects me whenever. To experience sheep and shepherd is to make me follow God more strongly. I'm a lamb of god. I just follow God.


Why did Jesus tell us the parable of the lost sheep in the bible? Let's think about the parable of the lost sheep. The shepherd went to find one lost sheep. What do you think about the ninety-nine sheep? How could the shepherd leave the other ninety-nine? Ninety-nine sheep were not more important than one lost sheep? I think the shepherd believed in the ninety-nine. He had confidence that they were safe, even in a dangerous area for the sheep with many enemies. So he could leave to find one lost sheep. When the shepherd finds one lost sheep, everybody enjoys the party. In my opinion, the shepherd needs the ninety-nine sheep and the one lost sheep. I want to be a lamb the shepherd can be confident in, so that he can go find other lost sheep.


Today is the Christmas party. Why was Jesus coming to the world? Everybody knows about Christmas. What? Santa Claus-mas. I like Santas Claus. I love Santa Claus. Jesus wished splendid Christmas? To celebrate the birth of Jesus Christ is to be a Santa Claus of love. I think Jesus showed the world love through his life. He showed the love.


Have you heard about The Butterfly Effect? The Butterfly Effect is that, if a little butterfly in the Brazil moves their wings, they can make a storm in Texas. We can make a storm of love with God`s love and our love. I think Habitat is bigger than a butterfly wing's moving. We can make a storm. Would you please make the Habitat effect? Just love. It will make the shepherd confident. I will try to make the Eunkee Effect. Thank you for this opportunity. Thank you for listening to me. Shall we sing a song of love?


Posted by 은기
2008. 4. 15. 12:22

본문 : 여호수아 6:1-20 (봉독1-4)

목적 : 믿음의 완성은 믿고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하면 되는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을 하면 된다. 우리는 여리고성을 돌았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말씀들 듣고 따라보자.

침묵과 외침

종이비행기를 접는 것은 간단한 일입니다. 종이비행기를 움직이게 하는 힘은 어디서 왔지요? 종이비행기의 역할은 무엇이었나요? 종이비행기가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우리들이 팔을 움직인 힘입니다. 그리고 종이비행기는 우리가 목표로 둔 방향을 찾아서 날라갔습니다. 그래야 목표물을 맞출 수 있고, 목표물은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종이비행기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가 종이비행기를 만들듯,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어떤 종이비행기를 만들었나요! 세밀하고 정확한 종이비행기를 만들었다면, 세밀하고 정확한 종이비행기를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종이비행기역할은 요구르트병을 쓰러뜨리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것이지만, 종이비행기를 움직이는 힘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움직였는나요! 우리가 목표를 두고 날려서 움직인 것입니다. 종이비행기는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였을 때 종이비행기는 요구르트 병을 쓰러뜨리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종이비행기는 그저 가만히 있었는데, 움직일 수 있었고, 요구르트병을 쓰러뜨릴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그저 가만히 있었던 사람들의 성경 이야기를 살펴봅시다.

(봉독)

어떤 내용인지 제가 간략히 설명하겠습니다. 여기서 성이 등장합니다. 무슨 성이지요? 여리고성입니다. 그 성은 "이스라엘 자손을 막으려고 굳게 닫혀 있고, 출입하는 사람이 없었다" 고 하였습니다. 어떤 성경이서는 "물이 셀 틈도 없었다" 고 하였습니다. 그 만큼 이스라엘 사람에게만큼은 전쟁을 치르기에는 어려운 성이었습니다. 전쟁 경험이 거의 없는 이스라엘로서는 어려운 싸움이었습니다. 실제적으로 성의 둘레는 약 0.6km정도 되는 작은 성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굳게 닫힌 성이었습니다.

그 어려운 싸움을 하나님은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시나요? "엿새동안 날마다 한 번씩 돌아라" 그리고 "이레째 되는 날에는 성을 일곱 번 돌아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6일동안 매일 6바퀴를 돌고, 7일째 되는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하고, 나팔 소리를 듣고 크게 소리치면, 성벽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려운 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을 어떻게 말씀하셨나요? 이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성을 우리가 지금 믿던, 믿을 수 없던 간에, 20절에 보면, 무너져 내렸다고 하고 있습니다.

6일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쟁에서 0.6km되는 거리를 어떻게 돌았습니까? 10절에 보면,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여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조용히 하였습니다. 그리고 7일째 되는 날에 일곱 바퀴를 돈 후에, 나팔소리와 함께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자신들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을 그냥 주어진 대로 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이 무너질 것을 믿었는지, 믿지 못하였는지는 성경에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은 하나님의 방법이 주어진 대로 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 앞에서 우리는 종이비행기와 연약한 존재입니다. 시험앞에서, 수 많은 숙제 앞에서, 하기 싫은 것들 앞에서 묵묵히 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때로는 조금 빼먹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여리고성은 작지만 무너뜨리기 힘든 성이었습니다. 마치 지금 비행기를 이렇게 벽에 던진다면, 이 벽이 무너질 수 있을까요?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지 않던 믿던 성을 7일 동안 묵묵히 돌았습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였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함께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행하는 이들에게 함께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저 주어진 것들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종이비행기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종이비행기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힘을 가하면, 이 종이 비행기는 목표인 요구르트병을 쓰러뜨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대단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단한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방법과 어떤 힘일까요?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힘일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어떠한 것들을 믿던, 믿지 않던을 오늘 이 시간만큼은 묻지 않겠습니다. 하나님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믿음을 묻지는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방법을 행할 때, 하나님의 힘이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Q.T 책을 읽어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 하나 실행해 보십시오. 그렇게 행할 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 목표를 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오늘은 왜 해야할지를 묻지 않겠습니다. 그저 해야할 것이 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해 보십시오. 하면 됩니다.

종이 비행기는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곳에 우리의 힘이 있었을 때, 목표를 쓰러뜨릴 수 있었습니다. 아주 쉽게 할 수 있었습니다. 종이 비행기처럼 우리는 가만히 있어봅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힘을 의지합시다. 그러면 됩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여리고성이 무너졌듯, 여러분의 비행기가 여러분의 방법대로 요구르트 병을 쓰러뜨릴 수 있어듯,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하나님의 방법대로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종이비행기 하나를 접어보겠습니다. 접기 전에 그 종이비행기에 자신이 하나님의 방법 중에서 어떤 것을 할 수 있을지 적어 보겠습니다. 그리고 헌금 시간에 우리가 종이 비행기를 하나님께 봉헌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파워스톰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리고성을 육일 동안 가만히 돌았듯,
하나님의 방법이 가만히 있는 것이라면,
가만히 있을 수 있게 인도해 주세요.
일곱째 날에 일곱째 바퀴를 돌고 소리를 외쳤듯,
하나님의 방법이 외치는 것이라면,
외칠 수 있게 인도해 주세요.
가만히 있어야 할 때와 외쳐야 할 때를
아는 파워스톰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세요.
그저 그렇게 하나님의 방법을
행동할 수 있는 우리가 되게 인도하여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립니다. 아멘

                                                                                                                       

*. 평가
일단 종이 비행기를 던져서 요구르트병 쓰러뜨리긴 했다.
하지만..
널부러진 요구르트 병과 산만한 분위기에서
설교를 하기에는 나의 카리스마가 아주 부족하였다.ㅜ;
새로운 시도는 좋았으나,
더 철저한 준비를 하고,
더 논리를 세워야 한다.
그 분을 더 잘 설명하고 싶다.

Posted by 은기
2008. 3. 27. 11:22

080319

본문 : 막 11:1-11

목적 : 종려주일을 보내고, 고난 주간을 맞으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또한 종려주일을 맞이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하였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신앙의 기초 단계의 아이들에게 교회력을 설명하도록 하자.

나의 십자가

현재 교회의 달력을 무슨 절기를 보내고 있다고 했지요?

사순절이라고 했지요?

사순절을 보내는 여섯 번째 주일을 뭐라고 할까요?

그 날이 오늘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무슨 주일이라고 할까요?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종려주일의 배경이 되는 부분을 오늘 읽었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마을입니다. 교회에서 대학로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 하신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통치 받았듯, 이스라엘은 로마에게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로부터 구원해 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메시아라는 말은 왕을 의미하는 것으로 새 생명을 통치하는 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게 로마로부터 구원해 줄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기 전에 들른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 때, 무엇을 타고 들어가셨나요? 나귀를 타고 가셨습니다. 제자들이 준비한 나귀였습니다.

나귀는 이 시대에 어떤 동물이었을까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낮고 천한 자들을 위하여 오신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이스라엘 백성의 환호를 원하셨을까요? 그렇게 스타의 모습을 갖고 싶으셨을까요?

나귀는 말과 얼룩말과에 속하는 동물입니다. 예수님이 살던 그 시대에 순결과 평화를 뜻하는 동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장한 나귀가 아니라, 새끼 당나귀를 택하셔서 타셨습니다. 이 당시 당나귀를 어떤 사람들이 탔을까요? 열왕기상 1장 33절에 보면, 왕이 타던 것처럼 귀중한 동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원했던 왕은 어떤 왕이었을까요? 식민지 상황에서 그들을 구원해 줄 사람을 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을 자유롭게 할 사람을 찾았을 것입니다. 위풍당당한 모습을 한 모습을 원했을 것입니다. 위풍당당한 모습을 원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풍당당하게 왕들이 탔던 나귀를 타고 백성들 앞에 등장하셨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명박 대통령에게 투표를 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나라의 경제를 살릴 수 있는 대통령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표를 주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필요한 것을 이루어 줄 사람이 그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유를 원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줄 사람을 예수님으로 믿고 환호한 것입니다. 7절과 8절에 보면, 겉옷을 펴서 예수님이 지나가실 수 있게 했다고 합니다. 열왕기하의 말씀에서 보면 왕을 대할 때, 존경의 표시로 겉옷을 편다고 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예수님께 왕에게 대우하듯이 예의를 갖춘 것입니다.

어떻게 환호하였나요? 9절, 10절을 크게 한번 읽어 봅시다.

"호산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호산나라는 것은 감탄사 같은 의미로 "구원해주세요"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를 얼마나 애절하게 기다리는지를 보여줍니다. 그 마음이 어땠을까요? 슈퍼주니어의 앨범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그것이 손에 쥐어졌을 때 어땠나요? 정말 바랐던 일이 이루어 졌을 때 어땠나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말 바라던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희망의 외침을 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한 번 더 크게 외쳐 읽어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드디어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셨고, 로마의 시대는 물러가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게 된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세상은 온 세상 나라들이 메시아가 통치하는 이스라엘에게 로마에게 이스라엘 이 했던 것처럼 복종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신 이유는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종려 주일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8절에 나오는 잎이 많은 생나무는 종려나무를 의미합니다. 종려 주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승리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시는 것은 누구의 바람이었습니까? 수많은 백성들의 고난을 이겨 낼 것에 대한 바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바람대로 왕들이 타는 나귀를 타셨고, 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백성들의 바람은 메시아로 온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왕적인 모습은 십자가로 가장 낮고 천한 모습으로 완성을 이루십니다. 온전한 메시아적 모습을 이 세상에 보이신 것입니다.

이번 주는 고난 주간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과 동시에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리는 주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고난을 당하셔야 했는지, 십자가에 왜 달리셨을 수밖에 없었는지 생각하는 주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의 외적인 모습에 환호하였습니다. 그 메시아가 자신들의 삶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죄인들이 처형당하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왕의 모습에서 죄인의 모습으로 추락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호는 실패인 것일까요?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에서 그것은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에서 만큼은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계획은 완전하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그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렇게 계획은 이루어 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왕의 모습으로 나타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적으로 당당한 모습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십자가 앞에서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셨듯,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실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입성의 완성은 무엇인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기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실패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를 선택하셨을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한다면, 믿는다면, 그 십자가는 실패가 아니라고 말하였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십자가는 어떤가요?

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면접이 필요합니다. 들어가기 싫었던 대학교에 면접을 보기 위해 면접장에 갔습니다. 면접을 보기 싫었습니다. 그래도 면접장에 갔습니다. 면접하는 교수님께서 저에게 딱 한 가지만 묻겠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질문은 예상 질문에서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면접장에서 선배들이 예상 질문들을 얘기해 줬을 때, 일일이 대답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떨어지기를 바라면서 준비한 대답들이었습니다. 왜 학교에 왔느냐?는 질문, 현재 사회의 문제 등등...그런데 예상 밖의 질문이었습니다. 갑자기 예상에서 벗어난 질문인 십자가를 생각하니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원래 저는 눈물이 별로 없는 사람인데, 신기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참으면서, 제가 생각하기에는...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참을 수 없어서, 그냥 눈물을 막 흘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유 없이 눈물이 흐르는데, 십자가는 저에게 있어서 눈물 같다고 정신없이 눈물을 닦으면서 면접장을 벗어났습니다. 그 이후 저는 더 (많이???) 십자가를 생각합니다. 나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무엇일까?

여러분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고난 주간동안 여러분에게 있어서 십자가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계획은 그 당시 시대에서 멈췄을까요? 구원하시는 계획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 구원을 이루어가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나귀를 타고 환호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

환호하는 백성들에게 삶으로 진정한 완성을 보여주신 예수님!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신 예수님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을 보내며,

왜 예루살렘 성에 예수님께서 들어가셨는지도

더 깨달아 알 수 있도록 인도해 주세요.

우리가 고난주간을 맞으면서,

진정한 고난주간의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십자가를 이해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십자가가 무엇인지 삶 속에서

알아 갈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은기
2008. 3. 27. 11:20

080307

본문 : 요 12:1-8

목적 : 마리아와 마르다의 헌신의 비교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의 구조를 선택하여 본인에 맞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피노키오이야기를 다시 보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분리적으로 사고하지 않고, 변화해야 하는 것이다. 한 번에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한 걸음 한 걸음으로 변화할 수 있다.

폴짝! 폴짝!

▶ 피노키오 이야기

거짓말을 하면, 코가 자라는 인형이 뭔가요?

제페토 할아버지가 만든 나무 인형 피노키오입니다. 피노키오 이야기는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만든 인형이 진짜 아들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며, 그것이 이루어 져서 잠든 밤에 요정이 나타난 피노키오에게 생명을 넣어줍니다. 그러나 피노키오는 생명을 얻었지만 아직 나무인형일 뿐 인간의 몸이 아니었습니다. 요정은 피노키오에게 어떻게 하면 인간이 될 수 있게 해 준다고 하나요? 학교에 가서 "옳고 그름"을 배워야지 진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만일 거짓말을 하게 되면 코가 쑥쑥 자라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피노키오는 인간이 되기 위하여 요정에게 학교에 갈 것을 약속을 합니다. 피노키오는 옳고 그름을 고정적으로 배우고, 인간으로 마땅히 해야 할 것들을 학교에서 배웁니다. 어릴 적부터 우리는 거짓말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이 이야기를 통해 배웁니다.

그러나 오늘은 옳고 그름이라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

오늘 읽은 성경에서 마르다와 마리아와 유다가 나옵니다. 이 세 명으로 옭고 그름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성경에 배경이 되는 이야기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형제가 죽었는데, 예수님께서 살리신 것을 축하하기 위한 잔치를 하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2절에 "시중을 들고 있었고" 라고 나옵니다. 이것을 원래 의미는 쉬지 않고 계속하여 예수님의 식사 시중을 들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마르다가 매우 부지런하며 손님대접 하기를 좋아하는 여성이었습니다.(눅 10 :40) 반면, 마리아는 어떠했습니까? 마르다가 열심을 내어 일하고 있었을 때,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마리아의 털로 닦았습니다. 향유의 값은 얼마라고 나옵니까? 삼백 데나리온입니다. 현재 일년 동안 번 노동자들의 품삯이라고 보면 됩니다. 일년 동안 번 돈을 하나도 쓰지 않고, 그대로 모아서 그대로 한 번에 예수님의 발을 씻는 것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누가복음 10장 38절에서 42절에 마르다와 마리아의 모습을 비교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과 비교하여 이 말씀을 말하고 싶습니다. 이 그림을 봅시다. 마르다는 손이 우락부락하고, 일을 하는 모습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앞에서 말씀을 경청하고 있습니다. 이 당시에는 이런 모습은 꿈 꿀 수 없는 모습입니다. 당시에는 여자가 말씀을 배울 수 없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여자들이 랍비들에게 말씀을 배우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여자는 랍비가 될 수도 없었고, 랍비 앞에서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은 꿈 꿀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랍비와 같은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를 칭찬하십니다. 이는 천대받고 있는 여성들이 배우는 것을 당당히 허용하신 것입니다. 이 그림에서는 예수님에 의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남녀도소, 빈부귀천, 민족 등의 구분을 뛰어 넘어서 누구나 접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사건을 그린 것입니다.

마리아는 비난을 받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는 유다에게 비싼 돈을 낭비하고 있음을 지적받았고, 마르다에게는 일하고 있지 않음을 지적받았습니다. 모두 자신의 정당성을 예수님께 증명하고 싶어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마리아도 마르다와 같이 일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합니다. 그 사건을 보는 주위 사람들도 마리아를 비난하였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법에 따랐다면, 마르다와 같이 일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0장 42절에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그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말씀 듣기를 좋아하는 '마리아에게서 말씀 듣고 있는 것을 빼앗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오늘 읽은 본문으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유다는 노동자가 일년 동안 벌어야 살 수 있는 향유를 붓는 마리아의 모습을 비난합니다. 옳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맞는 말입니다. 바른 말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마리아의 행동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지 못한 나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7절에 '가만히 두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리아의 행동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돈의 가치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사용하느냐, 어떤 곳에 쓰이느냐입니다. 1년 동안 벌어서 사용할 만한 가치를 예수님과 함께 하고 싶어하는 마리아를 칭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의 행동을 인정하지 않으신 것일까요? 마르다는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습을 칭찬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인정하지 않으신 것일까요? 마리아는 마리아 나름대로 예수님께 열심히 말씀을 듣고, 향유를 붓는 행위를 칭찬하신 것입니다. 이 두 명의 사이에서 옳고 그름의 요소가 있나요?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바라보시고 계시나요? 둘의 행동을 모두 인정하십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를 분리적으로 비교한다면, 누가 정당한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리하지 않으십니다. 누군가가 잘했고, 못한 것을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모두가 예수님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우리는 모두 다릅니다. 예수님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든지 예수님은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도덕과 윤리를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유다의 말처럼 향유를 팔면, 가난한 자들에게 충분히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8절에 가난한 자들은 너희와 언제나 함께하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함께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신명기 15장 10절도 보면, 가난한 자들은 이 땅에서 항상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는 항상 함께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돕는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일입이다. 그것을 하기 전에 해야 할 것은 예수님과 함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무엇인가를 하기 전에 해야 할 것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언제든지 남을 도울 기회는 많고, 가난한 자들은 이 땅에서 없어지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가난한 자들은 항상 도와야합니다. 그보다 앞서서 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할 기회는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믿고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마음이 변하면 여러분의 변화도 꿈꿀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마음이 우선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옳고 그름을 이야기 했습니다. 옳고 그름은 예수님 앞에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위한 어떠한 행위를 하느냐가 어떠한 마음이냐가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옳고 그름은 필요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서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님을 향한 마음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다른 일을 했고, 그것을 열심히 했던 것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님과 함께해 봅시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지금은 교회의 달력으로 보면, 사순절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의 뺀 40일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보내는 시간입니다. 여러분들이 사순절을 의미있게 보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학교에서, 학원에서, 집에서, 각자 각자 삶의 방식대로 예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마르다처럼, 마리아처럼 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모습이든지 아름답게 우리를 바라봐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를 할 때 한 번에 복권에 당첨되듯, 성적을 올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은 차근 차근 하나 하나 열심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를 아름답게 보아주시는 예수님을 더 알 수 있고, 우리의 삶은 변할 수 있습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마리아와 마르다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마음이 어떠하셨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언제나 어떤 모습이든지

우리를 판단하지 않으시고,

잘했다고 바라보시고,

언제나 기다리는 하나님!

우리 파워스톰이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을 꿈꿉니다.

예수님과 함께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를 때,

항상 어떻게 해야할지 알려주시고, 가르쳐 주세요.

오늘 예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결심한 것이 있다면,

그 결심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걸어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은기
2008. 3. 27. 11:11

080224

본문 : 누가복음 4:5-10

목적 : 하나님께 받은 선물은 너무나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감사하지 못한 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선물을 발견하는 것은 감사에서부터 시작이며, 감사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깨달아 보는 것이 목적에 있다. 또한 선물은 구하면 주어진다. 그러나 가장 필요하고, 시급한 것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선 물

▶ 선물에 대하여

받았던 선물 중에서 어떤 선물이 가장 좋았나요?

기분이 좋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선물을 받기 위해 어떤 일이 있었나요?

저도 이제 25살로 24년을 살았는데, 많은 선물을 주고, 받았습니다. 사실상 준 것보다는 받은 것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누군가로부터 가지고 싶었던 것이나, 받고 싶었던 것을 받게 된다면 정말 좋습니다. 필요한 물건이 있는데 그것을 받게 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우리는 우리 삶에서 이미 주어진 선물들을 모르고 지나칠 때가 많습니다. 우리 삶에 어떤 선물이 있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소풍가서 보물찾기를 하는 마음으로 설교에서 우리 삶의 선물을 찾아봅시다.

(성경봉독)

▶ 차를 선물한 아버지 이야기

어릴 적에 어느 분의 실화를 말하려고 합니다. 사실 실화라고 들었지만, 그 시기에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야기 하고 싶은 목적은 부잣집 아버지의 마음을 보고 싶어서입니다.

아주 부잣집의 아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들은 외제차를 갖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부잣집이기에 외제차 한 대쯤은 사 줄 능력을 가진 아버지였습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의 소원은 아들이 교회에 다니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교회에 절대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집에 있는 재산 중에 꼭 차를 사 달라고 했습니다. 이 둘의 합의점은 없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비싼 외제차를 받는 것이고, 아버지는 아들이 교회에 다니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느 날 교회에 안 나가도 좋으니깐 낡은 성경책을 주면서, 이 성경책을 한 번만이라도 책을 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아들은 성경책을 받으면서, 아버지께 내가 원하는 것은 차라고 하였다고 화를 내면서, 방구석에 성경책을 넣어두었습니다. 그리고 출근하신 아버지께서는 교통사고로 길가에서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하늘 나라로 가셨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잃은 슬픔보다는 차를 아버지께 선물 받지 못한 원망감으로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그 후, 몇 년 아들은 아버지가 그리워서 아버지께 받은 낡은 성경책을 열어보았습니다. 그 안에는 아들이 가지고 싶던 것보다도 더 좋은 차의 열쇠와 함께 쪽지가 들어있습니다. 또한 성경책에는 아버지가 읽었던 흔적으로 밑줄이 그어져 있었습니다.

그 쪽지에는 "나는 너에게 차도 사 줄 수 있고, 더 좋은 것도 다 줄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인 나의 하나님을 알게 해 주고 싶었다. 그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가 여기에 다 적혀있단다. 차는 언제든 안전하게 원하는 만큼 타거라. 그러나 제발 한 구절이라도 좋으니 이 책을 통해 너가 원하는 것들을 찾길 바란다. 아마 네가 원하는 차보다 더 큰 것들을 주실 것이다."

▶ 구한다=찾는다

이 이야기를 초등학생 때 할아버지 목사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때는 그 아들은 왜 바보같이 성경책을 열어보지 않았을까? 그 아버지는 왜 거기에 차 열쇠가 들어있다고 하지 않았을까? 등등 이상한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지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 들어 생각 그 아버지의 마음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그 만큼 아들에게 성경에 중요성을 알게 해 주고 싶었기 때문에 성경책 안에 차 키를 넣어 주었던 것입니다. 아들은 당장은 알 수 없었겠지만, 언젠가는 아버지의 그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 때 그 이야기 해 주신 분이 왜 그렇게 이야기 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은 직접 듣고, 본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다는 모르겠지만, 조금은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 아버지는 부자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의 삶에서 가장 부족한 부분을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서야 깨달았습니다. 가장 부족한 것은 아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하나님께 구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과 함께 아들이 원하던 차키를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원하던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뒤늦게서야 깨달은 것입니다.

오늘 성경 읽은 부분에도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5절부터 8절까지는 여행하는 친구에게 빵을 주는 마음. 10절부터 12절까지는 원하는 것이 많은 아들에게 무엇이든 주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밤중에 친구를 찾아갔다는 것은 그 친구가 그 만큼 절박했던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친구에게 빵을 주는 것과 주지 않는 선택권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부탁을 받은 친구입니다. 그 친구에게 절박한 상황에서 조릅니다. 필요한 만큼을 그 친구에게 줍니다. 그 친구에게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절박한 상황을 보았기 때문에 준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면, 생선을 주지 뱀을 주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살던 시대에 생선은 아주 필요한 식량입니다. 우리들이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입니다. 그러나 뱀은 비유적으로 사악하고, 해로운 것입니다. 아들이 필요한 생선을 구하면, 아버지는 생선을 주지 뱀을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달걀과 전갈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서 오늘 읽은 부분은 기도를 가르쳐주시는 부분이라고 흔히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제자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 싶었을까요? 기도를 하는 방법은 필요한 것을 구하면, 무엇이든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9절, 10절, 13절을 읽어볼까요? 9절 10절 중에서 구하라는 것은 요청하라. 요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요구하면,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입니다. 찾으면, 찾게 되는 것이고, 문을 두드리면, 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그렇게 들어주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요청하라는 것입니다.

처음에 이야기한 부자 아버지가 아들에게 무엇이든 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들의 상황에 맞게 줄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아들의 마음은 어땠습니까? 아버지에게서 무조건 차를 얻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차를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아들이 원하는 것보다 좋은 차와 아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성경책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기도의 방법을 물었던 제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가 무얼까요? 이미 들을 준비가 되어있으니, 말하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의도가 중요할까요? 중요하지 않습니다. 13절에 악할지라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그 사람의 상황에 맞게 주시며, 상황 속에서 언제나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힘을 성령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이라는 말이 뭘까요? 유나의 동생 성령이가 아닙니다. ^^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게 주신 마음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미 예수님께서는 들을 준비를 하시고 여러분에게 이것 저것 구하지 않은 것까지도 주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여러분에게 선물이 있을 것입니다. 그 선물을 찾아봅시다. 선물을 모르겠으면, 예수님께 그 선물을 알게 해달라고 물어봅시다. 그러면 어떠한 방법으로든 알려주실 것입니다.

▶ 준비와 도약

선물이라는 것을 받고 쓴다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사용하느냐. 그 가치는 달라집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들을 잘 발견하고, 알아가는 것을 구하고, 또 발견한다면,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요? 우리는 가족, 친구들을 선물로 받은 것 중에 하나일 수 있습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어떤 마음으로 다가가야 할까요?

닌텐도DS를 선물 받았습니다. 게임을 하면서, 즐거움의 가치를 둔다면, 즐거움의 가치를 찾는 것입니다. 그냥 게임이 아닌, 영어 게임을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다른 게임보다는 단어도 외우고, 영어 실력이 쌓아질 것입니다. 닌텐도 사용을 영어 실력에 가치를 두었기 때문에 영어 게임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평범한 일상일지 모릅니다.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시간이 흐르듯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평범할 지 모릅니다. 그 하나 하나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로 감사히 받으면서, 가치있게 사용하여 봅시다.

그러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선물을 달라고 구해봅시다. 기도해 봅시다.

어떻게 구해야할까요?

우리 상황에서 절박하고, 가장 필요한 것이 무얼까요? 그 선물이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이미 주어졌을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것이든 구하면, 들어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필요한 것으로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마지막으로 코이라는 물고기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코이라는 물고기에 대하여 아시는 분 계시나요? 코이라는 물고기는 작은 어항에서 키우면, 어항만큼 5cm밖에 자랄 수 있고, 아주 수족관이나 연못에서 키우면, 30cm정도 자라고, 큰 강에서 키우면, 2M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저는 이 물고기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파워스톰 친구들에게 꼭 이야기 해 주고 싶었습니다. 여러분의 꿈의 크기는 어떠합니까? 양과 질을 떠나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작은 어항만한 꿈이라면, 작은 어항만한 결과. 연못 만한 꿈을 꾼다면, 연못만한 꿈의 결과. 아주 큰 수족관. 강만한 꿈이라면, 그만한 꿈의 결과가 나온다는 것. 코이의 성장과정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 꿈 꿔 봅시다.

여러분이 어떤 꿈을 꾸고 있습니까? 그 꿈을 위해서 구합시다.

큰 코이와 작은 코이는 같은 종류입니다. 그러나 어떤 성장을 하느냐에 따라서 다른 코이가 되었습니다. 큰 코이는 큰 코이대로의 중요성이 있고, 작은 코이도 작은 코이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우리도 꿈을 꾸는 만큼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상황과 처지를 아시는 예수님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분명, 구할 때 우리를 돕는 힘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많은 선물을 주신 예수님

오늘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다,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우리 파워스톰이 아직은 잘 몰라서,

구하는 방법 조차 모를 수도 있습니다.

찾는 방법 조차 잘 몰라서, 찾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이 찾고, 구하기를 기다리시는 예수님.

우리 한 사람이 예수님께 요청하는 것이 있다면,

꼭 필요한 것을 요청하게 해 주세요.

그래서 예수님께 꼭 필요한 선물을 받는 파워 스톰이 되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선물을 잘 찾고,

그 선물을 잘 사용하는 사람이 되게 인도해 주세요.

더 찾고, 구하는 우리가 되고 싶습니다.

우리 00.00.00.를 삶 가운데서 그렇게 인도하여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은기
2008. 3. 22. 12:57

080203

목적 : 다윗이 싸움을 한 목적은 온 세상에 하나님을 알게 하고자 함이었다.

하나님의 일은 기술이나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생애의 최고의 순간을 위해 언제나 준비하는 삶을 살자.

준비된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 돌을 던졌다.

본문 : 사무엘상 17:41-54

다윗과 골리앗(온 세상에 하나님을 알게 하자)

‣ 우리 생애 최고 순간

핸드볼 선수들의 감동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요즘 화제를 일으켰던 영화 제목이 무얼까요? 우행시에 이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우생순입니다. 본 사람 있나요?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편인데, 눈물을 흘리면서 보았던 영화입니다. 눈물이 났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영화를 보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핸드볼은 올림픽 때만 반짝 메달을 안겨주는 종목입니다. 핸드볼 대잔치 같은 시기에는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핸드볼은 비인기종목입니다. 부와 명예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핸드볼 선수들의 설 자리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주인공 선수들은 국가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합니다. 어찌보면 그들의 설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올림픽 때만이라도 빛을 바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핸드볼팀은 처음에는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팀 안에서 분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기를 위해 하나가 되어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서로 믿지 못하였을 때에는, 공을 패스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서로 믿고 공을 패스하였습니다. 비인기종목이란 소외된 곳에 있었지만, 그들이 하나됨으로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몸부림은 아줌마가 되어서도 나이가 많아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고, 다리가 다쳐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지는 몰라도, 경기합니다. 이러한 힘든 상황에서도 어쩔 수 없이 핸드볼 공을 던져야 합니다.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과는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은 어떤가요? 우리들은 어리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것들도 마음대로 못합니다. 교회에서도 열명 정도의 가장 적은 인원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보기에는 보잘 것 없습니다. 또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아침부터 자신과의 싸움을 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귀찮고 짜증이 날 때가 있습니다. 영화 속 선수들의 어찌 할 수 없는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의 몸부림은 세상에 감동을 주고 있고, 많은 사람을 극장에서 울고 웃게 하였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몸부림으로 세상에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 다윗

오늘 읽은 성경 부분에서 다윗은 다윗 생애 최고의 순간의 싸움을 합니다. 소년과 거인의 싸움입니다. 성경에 읽은 블레셋 사람 골리앗은 키가 3미터 정도입니다. 소년은 저 정도의 키입니다. 이 골리앗 앞에 누구도 나서지 못하였습니다. 골리앗은 당당합니다. 그 앞에 다윗이 섭니다. 골리앗은 다윗에게 나를 개로 여기느냐고 하면서, 다윗을 저주하였습니다. 골리앗 앞에서 다윗은 절대 쫄지 않았습니다.

45절에 어떻게 다윗은 말하였습니까?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너에게 나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골리앗에게 나온 것입니다. 다윗은 양을 돌보는 목동이었습니다. 목동은 양을 지키는 일을 합니다. 양은 곰이나 사자에게 먹이가 되는데, 다윗은 위험한 동물로 부터 양을 보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윗의 혼자 힘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의 위험한 상황 속에서 구해 주셨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을 믿고 골리앗에게 나간 것입니다.

그리고 또 나간 목적이 있었습니다. 46절에 있습니다. “온 세상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게 하겠다.” 골리앗은 다윗을 비웃으면서 다윗이 믿고 있는 하나님을 비난하였습니다. 다윗을 언제나 지켜주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믿고 의지했던 다윗은 블레셋 사람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겼습니다. 50절에 칼도 들고 가지 않고, 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싸움은 상식적인 싸움이 아닙니다. 정상적인 싸움이 아닙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한다면, 골리앗은 다윗을 죽이고, 그를 당해낼 자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골리앗이 죽고, 다윗은 살았고, 이스라엘 민족이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47절에 나옵니다. 읽어 볼까요?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를 쓰셔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기에 모인 무리가 알게 하겠다. 전쟁에 이기고 지는 것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칼이나 창을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싸움의 승패는 싸우는 사람의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의 손에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그 손에 승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사용했던, 다윗은 승리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것을 바라시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언제나 하나님을 경험하였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위험한 상황에도 어떠한 순간에도 다윗과 양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다윗은 순간 순간 생애 최고의 순간을 살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면, 우리도 최고의 순간을 살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 우리

어떤 몸부림을 치면 될까요? 우리도 하나님을 더 믿어 봅시다. 보다 열심히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합시다.

비인기 종목인 핸드볼 선수들은 핸드볼이라는 종목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처음에는 팀 안에 분열이 있었습니다. 감독은 선수들을 믿지 않았고, 선수들끼리도 서로를 믿지 못했기 때문에 패스를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선수들이 믿고, 의지하였기 때문에 공을 패스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우리의 걱정과 염려를 패스해봅시다. 우리 파워스톰과 하나님이 진짜 한 팀이 되어봅시다. 우리 선생님들과 우리 학생들이 하나가 되어 한 팀을 이루어 하나님께 패스해 봅시다. 그렇게 끝까지 몸부림을 쳐봅시다.

어떤 몸부림이어야 할까요? 다윗이 했던 것처럼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목적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인지 알고, 하나님을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파워스톰이 하나가 되어, 어디에 있든 어느 곳에 있든 서로를 생각해 주며, 아껴주어야 합니다. 우리 몸에 장이 소화기능을 잘 못한다고, 떼어서 버릴 수 없습니다. 간이 필요 없다고, 간을 버릴 수 없습니다. 우리 파워스톰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몸을 이루듯, 서로 아껴야 합니다. 그 중 하나는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학생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학생들도 선생님들을 위해 기도하며,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게 Q.T를 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기도와 성경을 통하여 우리 안에 사랑을 만들어 봅시다. 학생이라는 신분으로 최선의 공부를 해 봅시다. 공부를 하면서 하나님을 경험해 봅시다. 그렇게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패스해 봅시다.

어떤 기술도 방법도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을 믿으면 됩니다. 그렇게 우리가 몸부림치면, 내가 하나님을 경험하면, 나의 친구, 가족도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파워 스톰의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지금부터 시작해 봅시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언제나 패스해 주시는 하나님

우리 파워 스톰이 하나님께서 던지시는 공을 받을 준비를 합니다.

또 우리의 마음을 담은 공을 하나님께 패스합니다.

다윗이 골리앗에게 돌을 던지는 마음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직은 그 마음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순간 순간 하나님의 방법을 더 알게 인도해 주세요.

그 순간 순간이 우리 생애에 최고의 날이 되고 싶습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 파워스톰 생애의 최고의 순간을 시작합니다.

함께 인도하여 주세요.

또 결심하고, 쉽게 포기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를 포기하지 언제나 포기하시지 않는 하나님!

오늘의 각자 결심을 기억해 주세요.

우리가 포기하지 않게 도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최고의 순간을 위해 전진하는

파워스톰이 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은기
2008. 3. 22. 12:54

080120

목적 : 무언가 시도하고, 도전하는 시기. 미래를 꿈꾸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였다고 좌절할 수 있다. 어른도 어린이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왜 할 수 없는지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 보고, 믿음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생각하자

본문 : 마 17:14-20

말씀 분석

17:14-20
14-16 간질병 걸린 아들을 갖은 아버지의 하소연.
- 왜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였습니까?
17 간질병 걸린 아들을 갖은 아버지에게 믿음 없음을 하소연 하심.
18 귀신을 쫓아 내심.
19 제자들이 따로 물음. “왜 우리는 하지 못하였습니까?”
20 너희 믿음이 적기 때문이다. 너희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너희들 안에 있는 믿음을 신뢰하라.

무 한 도 전

‣ 무한도전- We can do it!

대한민국 평균 이하 여섯 남자의 별난 도전 이야기가 무얼까요? 오늘 설교 제목이기도 합니다.

무한도전입니다. 한 번쯤은 본 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한 도전 맴버들이 12월 MBC시상식에서 많은 상을 휩쓸었지요. 뉴스에서 무한도전이 캐이블 채널을 통해서만 1주일에 90회 방영된다고 합니다. 엄청난 횟수입니다. 이러한 인기가 처음부터였을까요? 저도 처음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잘생긴 사람들이 나오는 프로그램도 아니었습니다. MC인 유재석은 개그맨이지만, 메뚜기라는 별명을 가진 웃기는 개그맨이 아니었습니다. 호통개그가 누구지요? 박명수는 비호감의 대명사였고, ‘가는거야’라고 외치는 노홍철도 별나고 특이한 사람 정도였고, 하하는 가수인지도 모르는 가수였고, 정준하도 별것 없었습니다. 정형돈도 그리 인기 있는 개그맨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평균이하 라고 자칭합니다. 저는 맴버들을 지금도 그렇게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평균이하들이 벌이는 아옹다옹 엽기 발달한 모습들이 웃음과 편안함을 줍니다.

평균이하의 모습이 우리 파워 스톰 모습의 모습은 아닌가요? 일단 우리도 몇 되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아옹 다옹합니다. 우리 파워 스톰 시기는 가장 활동적이고 바쁜 시기입니다. 그래서 꿈을 꾸는 낭만적인 시기입니다. 그런데 꿈꾸는 낭만적인 시간을 갖기 보다는 이곳 저곳 이끌려서 의미없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열심히 공부를 하던 중에 성적이 안 오른다거나 실력이 늘지 않을 때, 자신 스스로 기대하는 머리 스타일대로 머리가 나오기 않을 때. 핸드폰 문자 하나에 울고 웃는 등등 무력하다는 것을 느낌입니다. 자신감을 상실하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자신이 초라한 사람으로 느껴질 수 있을 것입니다.

‣ 성경에서는 어떻게 할 수 있다고 하는가? - 제자들의 모습. 예수님의 모습.

오늘 성경 속에서 초라한 마음을 느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의 모습을 보기 전에 성경의 전반적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간질병을 아는 사람이 있나요? 저는 간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두 명을 보았습니다. 한 명은 유치원 시절 다디던 교회의 오빠였고, 한 명은 중학교 때 교회를 같이 다니던 언니였습니다. 불과 몇년 전에는 간질병이 불치병으로 고치지 못하는 병 중에 하나였습니다.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면,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직이거나, 소리치거나 합니다. 유치원 시절의 교회 오빠는 수영을 좋아하였는데, 수영을 하다 간질 발작을 일으켜서, 영원히 물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읽은 부분에서도 보면, 간질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의 하소연으로 시작합니다. ‘불 속에 빠지기도 하고, 물 속에 빠지기도 합니다.’ 라는 것으로 아주 위험한 상황을 겪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병을 고치기 위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데려갔지만, 제자들이 병을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아이를 데리고 가서 병을 고쳐달라고 합니다.

이미 제자들은 마태복음 10장 8절에 보면, 제자에게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10장이 배경이 된 시기는 A. D 28년쯤이었고, 오늘 읽은 17장은 A. D 29년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1년 정도 함께 하시고, 1년 동안 많은 것들을 보여주시며,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미 능력이 있는 제자들은 위험한 상황에 처한 간질병을 앓고 있는 아이에게 어떻게 하였나요? 병을 고쳐주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병을 고쳐주고 싶지 않았을까요? 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 순간에’ 나았다는 것으로 즉시, 바로 나았다는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따로 예수님께 물어봅니다. 그것을 보아 제자들도 병을 고쳐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병을 고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예수님께서 20절에 말씀해 주십니다. ‘믿음이 적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이미 능력이 있었는데, 그 능력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너희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겨자씨를 본 적이 있나요? 저는 인도 여행을 할 때, 히말라야 산맥 줄기에서 보았습니다. 여기에 있는 사진이 겨자꽃 입니다. 유채꽃과 비슷한 노란색이 평야에 퍼져 자랍니다. 제주도의 유채꽃밭보다 더 크게 퍼져있는 정도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겨자 꽃 안에 아주 작은 검은 씨가 들어있습니다. 이 종이에 점을 하나 찍어 볼까요? 이 크기 정도 되는 믿음입니다.

‣ 어떤 것을 할 수 있을까?

제자들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라시는 것은 큰 믿음이 아닙니다. 겨자씨 만한 작은 믿음의 희망이라도 있다면,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겨자꽃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만 있으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작은 겨자씨에서 아름다운 겨자꽃을 피우며, 겨자꽃 안에 아주 많은 겨자씨를 만들어냅니다. 겨자꽃 안에 무수한 겨자씨들은 겨자평야를 이룹니다. 겨자씨가 보기에는 작지만, 겨자 평야를 만들만큼 그 안에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좌절한 제자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 안에서 무한한 능력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희망을 주시는 마음입니다. 그 희망의 마음으로 병에 걸린 아이를 고치신 것입니다. 그러한 희망은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사람들에게만 허락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희망을 전해주실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라는 주인공에 가려진 엑스트라로 느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 평균 이하의 남자들, 연예계의 주변부에 있던 사람들이 모인 무한 도전은 시청률이 4-5%로 모두에게 관심을 받지 못 하였습니다. 그들은 연예인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캐릭터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겨자씨만한 믿음의 역할은 무한도전 맴버들에게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살던 시대에 무한 도전이 있었다면 무한도전 맴버같은 믿음이라고 말하셨을지도 모릅니다. 겨자씨에 그 시대에 흔했던 것이었기 때문이죠! 무한도전 맴버들이 평균이하이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희망을 전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주인공인 한 사람의 움직임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작은 겨자씨가 꽃을 피우고, 평야를 만들 듯, 한 사람 한 사람의 역할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시기는 꽃을 피우고, 평야를 만들기 위해 작은 겨자씨. 알찬 겨자씨를 만드는 시기일 것입니다. 파워 스톰도 우리끼리 아옹 다옹 아기자기한 예배만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꽃을 피고, 평야를 만들기 전에 우리는 작은 겨자씨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파워 스톰도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성실히 최선을 다해 봅시다.

성실히 최선을 다해 잘 해야할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파워 스톰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각자의 학교와 가정을 위해서,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는 오늘 결심하였지만,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또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이 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예수님께 물었던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께 물어야 합니다. 묻는 방법 중 하나는 기도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무한도전 맴버들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듯, 우리도 겨자씨만한 믿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해 봅시다.

하나님!

오늘 작은 겨자씨를 점찍으며 그 크기를 헤아려 보았습니다.

그 만한 믿음이 있으면 ‘너희가 못할 것이 없다’ 고 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께 따로 물었던 제자들처럼

주인공 앞에 가려진 엑스트라같이 느껴지지만,

우리가 귀한 존재임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알게 해 주세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무한도전 맴버들이 최선을 다했던 것처럼,

우리도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라고 말한 바울처럼 믿고 행하는 우리가 되게 인도해 주세요.

오늘 결심한 것이 있다면, 행하게 인도해 주세요.

작은 겨자씨가 너무나 아름다운 노란 꽃을 피워내듯,

노란 꽃이 그 안에서 셀 수 없는 작은 겨자씨를 만들어 내듯,

셀 수 없는 작은 겨자씨들이 아름다운 평야를 만들어 내듯,

아름답게 성장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우리 파워스톰이 되게 인도하여 주세요.

예수님 우리에게 희망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희망을 기억하게 해 주세요.

그리고 우리의 지금 이 마음을 드립니다. 기억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은기
2008. 3. 22. 12:45

080113

목적 : 2008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세상에 빛은 무엇인지 살펴보며, 진정한 빛이 되자.

빛 된 존재인 자신을 알고, 자신이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찾도록 한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는 말씀을 기억하며, 점검한다.

본문 : 마 5:14 - 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마을은 숨길 수 없다.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놓아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빛을 비춥시다.

오늘은 설교 제목은 ‘빛을 비춥시다’입니다. 빛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시간을 보내 봅시다.

빛이 없었던 경험을 했던 적이 있나요? 빛이 없었다는 것은 어둡고 깜깜했던 곳에 있었던 적이 있었냐는 것입니다. 밤에 정전이 되어서, 어두웠던 경험 등 어둡고 깜깜했던 곳에 있었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3년 전에 한 달 간 인도 여행을 했습니다. 그 때 너무 어둡고 깜깜한 곳에 있어 생명에 위협을 받을 만할 정도로 위험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바라나시라는 도시를 알 것입니다. 인도 사람들의 영혼의 고향이기도한 갠지스강이 있는 도시입니다. 26시간 기차를 타고 그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사전 조사를 할 때, 바라나시는 유명한 관광지이기 때문에, 외국인을 노리는 범죄조직이 있을 정도로 위험하다고 하였습니다. 26시간이라는 시간을 그러니까 하루하고도 2시간을 더 기차를 탔습니다. 그 날 인도의 공휴일이 겹쳤기 때문에 기차에는 무임승차 등 정원의 3배정도 되는 사람이 기차에 탔습니다. 기차에서 내리는 것이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었습니다. 바라나시가 위험한 도시이기 때문에 낮에 도착하게 기차를 예매했지만, 연착으로 인하여 밤에 도착하였습니다. 기차역을 빠져나갈 무렵, 도시는 갑자기 정전이 되었습니다. 도시 전체가 정전으로 갈 곳도 찾지 못할 정도 였습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택시를 탔습니다. 정전이 된 상태이고, 피곤한 상태였습니다. 바라나시에서 가장 위험한 행동이 밤에 택시를 타는 것이었는데, 우리 일행들은 택시를 탄 것이었습니다. 택시를 타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택시는 원하던 숙소 근처가 아닌, 어두운 길목에 세우고선 따라오라고만 하였습니다. 골목 안으로는 택시가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바라나시는 아주 작은 골목으로 이뤄진 도시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따라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15분 이상을 따라 가도 골목의 끝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길은 정전이었기 때문에 아주 깜깜하였고, 지도에도 없는 길을 갔기 때문에 우리는 범죄조직에 끌려가서 죽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야 겠다는 생각으로 택시기사에게 더 이상 우리를 가지 않겠다고 하였지만, 그 기사는 아주 골목으로 우리를 이끌어 갈 뿐이었습니다. 가지고 있던 랜턴도 고장 난 상황이었고, 아주 작은 골목에 타지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우리들은 택시기사가 다른 일행을 데리고 오기 전에 도망가자고 하였습니다. 저는 검도를 2년정도 운동하여서, 막대기가 있으면 공격하는데는 무리가 없었기 때문에, 마침 길가에서 막대기를 주워 앞장섰고, 남자 일행은 태권도를 했으니, 뒤에서 본다고 했습니다. 비록 막대기를 쥐고 있었지만, 깜깜하고, 어둡고, 죽게 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저는 어려운 상황이든 어느 상황이든 기도를 하는데, 그 상황에서는 기도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도와달라는 말조차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일단 보이는 골목으로 골목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작은 빛이라도 있으면 쫓아갈 텐데, 빛 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이곳에서 맞이하는 구나 싶었습니다. 골목 사이에서 거지같은 사람들이 초를 들고 어디론가 향하는 발걸음이 있었습니다. 깜깜한 길에서 빛은 죽음을 면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그 무리를 쫓아갔습니다. 거지들을 따라가니, 새벽에 음식을 배급해주는 곳이었습니다. 무료 급식소 같은 곳이었습니다. 천만 다행이었습니다. 26시간 기차를 탄 것이 너무 힘들었는데, 기차에 사람이 너무나 많아 내리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곳은 도착하자마자 정전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골목길에서 범죄조직에 이끌려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만난 빛은 정말 행운이었습니다. 깜깜하고, 어디로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빛은 제가 가야할 길을 비춰주며, 안내해 주었습니다.

깜깜하고 어두운 상황에서 빛은 안내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경험했던 빛과 함께 오늘의 읽은 성경 내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 14절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부분은 읽은 부분을 포함하는 5장부터 7장까지 전부 예수님께서 설교하신 내용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장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산에서 설교하셨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지금 이렇게 설교로 말하고 있듯,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너희라는 것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5장 1절을 살펴보면, 답이 있습니다. 무리와 제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리는 정확히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제자’는 예수님을 따르던 12명의 제자들로 확실합니다. 무리와 제자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설교를 들을 수 있는 편한 장소가 있었는데도 불편한 장소인 산에서 설교를 듣고 있었습니다. 즉, 예수님들 알고 싶어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들도 지금 어떤 상황에서든지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있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세상의 빛이다’ 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세상의 빛이란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 의미를 살피기 전에 ‘세상’이라는 말을 살펴보겠습니다. 세상이라는 것은 영어로 world. 국어 사전에는 ‘사람이 살고 있는 모든 사회를 통틀어 이르는 말’ 즉, 우리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빛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빛은 무엇일까요? 앞서 제가 말했던 빛이 저에게 어떤 역할을 했는지 생각해 봅시다. 길을 잃고, 깜깜하여 죽음의 위협이 있는 상황에서 깜깜한 어둠 가운데서 작은 빛으로 안전한 곳까지 인도해 주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빛’은 성경의 원래 언어로 ‘puhos’로 잘못 됨의 개념과 반대되는 의미이며, 발광한다는 의미입니다. 발광은 반짝인다. 빛에 의해 드러난다는 의미입니다.

빛이 드러난다는 것을 다음 구절에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들으면서 머릿 속에 그림을 그려봅시다. 높은 산을 그리고 그 위에 집을 몇 채 그려봅시다. 높은 산에 그려진 집들은 마을일 것입니다. 그것은 눈에 띄는 것입니다.

15절에 말이라는 것은 곡식이 얼마만큼 들어있는지 알 수 있는 나무 그릇으로 과학실에서 사용하는 나무 비커같은 것으로 보시면 됩니다. 그 그릇으로 등불을 켰을 때. 그릇으로 덮어놓으면, 불이 오랫동안 꺼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그릇으로 덮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등경은 등불의 받침대로서 불빛을 멀리 퍼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15절을 정리하면, 불을 오랫동안 꺼지지 않게 차단하기 보다는 불빛을 퍼질 수 있게 해서,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어두움을 경험했던 것에서 빛을 생각해봅시다. 어두운 곳에서 빛은 빛의 세기이냐에 관계없이 밝음으로 인도합니다. 제가 인도에서 빛을 경험한 것은 어둠 가운데서 밝은 곳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불안했던 곳에서 안전한 곳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제가 불안하게 경험했던 어두움은 우리의 현실같다고 생각합니다. 방학을 맞이하기 전에 성적표를 받았을 때, 친구와의 관계가 좋지 못하였을 때 등 친구와 성적으로 울고 웃는 우리의 현실은 미래를 알 수 없는 불안한 상황으로 어두운 상황일 것입니다. 학원과 학교로 정신없이 원하지 않는 공부를 하는 것도 어두운 상황일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상황이 마냥 어두운 마음이 아닌 즐겁고 기쁜 친구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두움 가운데서도 빛을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 가지 현실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상황 속에서 빛이 되어 봅시다. 빛은 어두움과 밝음 가운데서 존재합니다. 우리의 상황은 뛸 듯 기쁠 때도 있고, 짜증날 때도, 슬플 때도, 즐거울 때도, 괴로울 때도... 여러 가지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빛이다’고 하십니다. ‘빛이다’ 라고 말씀하셨지, ‘빛이 되라’는 명령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빛인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빛은 눈에 띠는 것이며, 어두운 곳을 밝게 한다고 했습니다. 16절에 보면, 빛을 사람들에게 비춘 결과는 사람들이 착한 행실을 본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모였습니다. 이 예배를 통하여 예수님을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빛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비추어야 할까요? 빛을 비춘 결과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착한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이 자리에 모인 우리 친구들의 착한 일을 사람들이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빛을 비춰 봅시다. 길을 잃고 어쩔 줄 모르던 저에게 있어서 빛은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또, 빛은 잘못된 방향을 바르게 잡아주었습니다. 우리 파워 스톰 한 사람 한 사람들 안에 빛을 비춰봅시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착한 일은 무엇이 있을까요? 누구에게 해야 할까요?

우리에게 빛이다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서, 우리 안의 빛을 발견해야 할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잘 못 된 것이 있다면 빛을 비추어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2008년을 시작한지 벌써 12일이 지났습니다. 세웠던 계획은 잘 이루어지고 있나요? 12일이라는 뒤를 돌아보면 후회이겠지만, 아직 353일이라는 날이 남아있습니다. 남은 동안 날 동안에 세상에 우리 빛을 비춰봅시다. 파워 스톰 1년 표어는 “보시기에 좋았더라”입니다. 우리를 이 세상 창조하시고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작품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빛을 이 세상에 비추는 사람들이 되어 봅시다. 어떻게 비추어야 할지 모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1장 9절에 보면,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아 믿을 수 없을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늘 낮에 햇빛을 비춰주시듯, 빛을 비춰주고 계십니다. 그 빛을 알 수는 없겠지만, 알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빛을 비춰봅시다. 착한 일을 해 봅시다.

하나님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다윗이 말했던 것처럼, 우리 삶의 빛이 되신 하나님.

그리고 우리에게 ‘너희들은 세상에 빛이다‘라고 말씀하신 하나님.

어떤 사람에게만 빛을 비추시지 않으시고,

모두에게 빛을 허락하신 하나님.

우리 파워 스톰이 세상에서 빛을 비추기로 결심하려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방향을 찾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빛으로 어두움 가운데서 인도하여 주세요.

또한 우리에게 허락하신 빛을 더 깨달아 알 수 있도록 하시며,

어둠의 세상에 착한 일로 빛을 비출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은기
2008. 3. 22. 12:44

071209

본문 : 눅 10:25-37

목적

1) 대화 구조로 깨닫게 하시는 예수님(-관계하시기를 좋아하시는 모습-)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도 그렇게 대화하시고 계신다.

2) 강도 만난 사람에게 있던 사람들은 제사장, 레위 사람, 사마리아인이었다.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다. 사마리아인이 어떻게 하였는가?

3) 예수께서는 이런 사람이 바로 우리의 이웃이라고 이웃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 않으셨다. 그 대신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가서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미 삶에서 답들을 가지고 있다. 그를 실천하여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성서를 읽기 전에)

오늘은 간단한 문제를 풀고 성경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파워스톰을 맞고 계신 전도사님의 성함이 무엇일까요?”

“교회 이름은 무엇일까요?”

“이웃은 영어로 무엇일까요?”

(성서를 다 읽은 후)

오늘의 설교의 제목은 마지막 절에 나오는 부분입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가 가서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성경을 읽기 전에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을 했습니다. 질문에는 항상 답이 있습니다. 시험 문제에도 항상 답이 있듯 말입니다. 오늘 질문을 한 이유는 성경에서도 이렇게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질문에도 답이 있었습니다. 29절에 율법 교사는 예수님에게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교사(율법을 잘 아는 사람)에게 이웃이 누구인지, 사전처럼 정의해 주신 것이 아니라, 이야기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질문에 대한 답을 해 주신 것입니다. 그 이웃에게 무엇을 해야 할 지도 지시하신 것이 아니라, 이야기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에게 이웃은 어떤 것인지 설명하시면서, 이웃에게 해야 할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볼 내용입니다. 이웃이라는 말을 친구라고 생각해도 좋겠습니다.

나누어 드린 그림을 통하여, 오늘의 성경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화가 반 고흐를 들어 보셨나요? 숙제를 위하여 지난 금요일 시험을 마치고, 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고흐 그림 전시회에 다녀왔습니다. 고흐가 그린 그림들은 단순히 ‘잘 그렸다’고 칭찬함과 동시에 고흐의 그림에 감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감명 받았던, 그림 중에 하나가 이 그림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 내용을 바탕으로 ‘들라크루아’라는 화가가 그린 ‘착한 사마리아인’을 따라서 고흐가 그린 그림입니다. 사마리아는 이스라엘의 도시 이름입니다. 사마리아인이라는 것은 사마리아 도시 출신의 사람을 뜻합니다. 말하자면, 서울인하면, 서울 사람과 같은 말 입니다. 사마리아 출신 사람들은 다른 도시의 사람들에게 무시 받았습니다. 율법을 어긴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에서는 다른 나라 사람을 이방인이라고 하는데, 이방인과 결혼하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나라 사람들과 결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림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은 누구일까요? 30절에 보면,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어떤 사람을 때려서 죽게 된 채로 버려두고 갔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과 여리고는 도시의 이름입니다. 인천에서 서울로 이동하던 길에 강도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과 여리고를 가는 길이 어땠을까요? 그림을 보고 말해 봅시다. 길은 구불 구불하고, 험한 산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후에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지나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하였다고 합니다. 제사장은 목사님과 같은 사람이고, 레위 사람은 그 당시에 하나님을 잘 믿던 민족의 사람입니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그림에서 어디에 있을까요?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그를 돌보고,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줍니다. 그림은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주는 사마리아 사람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그림에서 보물 상자를 찾을 수 있을까요? 이는 강도당한 사람은 옷을 벗기고 때려서, 죽게 될 정도로 몸에 힘이 없었고, 보물 상자가 비어있는 것을 보아서, 돈도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은 두 데나리온을 주며, 강도 만난 사람을 더 돌보며,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데나리온이라는 것은 화폐의 단위로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라고 합니다. 두 데나리온은 16만원에서 20만원 정도의 돈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여관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지불하고, 더 필요한 만큼 그 사람을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위해 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사마리아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강도 만난 사람에게 해 주었습니다. 돈과 시간과 하룻밤동안 간호하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를 듣고, 율법 교사가 사마리아 사람을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 교사는 스스로 처음에 ‘누가 내 이웃입니까’ 묻고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이웃은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물음에 대하여 답하여 주신 것이 아니라, 율법 교사가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게 도와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궁금한 점이 있다면, 왜 ‘누가 내 이웃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왜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했을까요? 이웃(친구)이(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사마리아 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였을까요? 앞에서 언급하였듯, 사마리아 출신은 율법을 어긴 민족으로 무시 받던 민족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교사는 율법을 잘 알고, 그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율법 교사는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는 말이 더 좋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떻게 말했느냐가 아니라,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부르는 것보다는 어떻게 행동하냐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율법 교사가 깨달은 바를 그대로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율법 교사는 율법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율법 교사는 제사장과 레위인을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으로 이미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율법을 어긴 사람으로 무시하고, 그러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질문을 한 이유는 29절이 나오듯,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입니다. 옳다는 것을 확인 받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는 잘 못 하고 있어 이렇게 꾸짖으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이야기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웃(친구)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좋은 이웃은 레위인, 제사장 아니라,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함께 해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필요한 것을 해 주는 사람은 율법 교사도 말했듯, “자비를 베푼 사람이었습니다” . 자비는 (e[leo") 단순한 자비가 아니라, ‘적극적인’ 자비를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적극적으로 강도만난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을 모든 것을 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친구들을 대할 때, 율법 교사가 사람들을 대하듯, 선입견을 가지고 대할 수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을 잘 지킬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은 율법을 어기는 나쁜 사람이다’ 이렇게 선입견으로 친구나 선생님 가족들을 대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함께 기억하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입견을 가지고 사람을 다하시기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 한 우리의 이웃은 우리와 함께하는 모든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와 친하고, 나에게 잘 해주고, 나와 같은 학교, 교회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그림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등을 돌리고 있지는 않은가요?

저는 이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면서, 등 돌리고 있는 모습이 저의 모습 같았습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살지? 저 사람은 이래서 싫어. 저 교수님은 왜 이런 걸 시키지? 등등.... 저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사람들을 판단한 것이었습니다. 선입견을 가지고, 주변 사람들을 판단하였습니다. 등 돌린 그림을 등 돌리지 않은 모습으로 바꾸는 삶을 살고 싶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에게 그 전의 잘못을 질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깨달은 바를 실천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님은 잘못을 질책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저 오늘 깨달은 바를 실천하면 될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들은 질문에 대한 답들을 다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에게 이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한 이웃은 어떤 존재였나요? 자비를 베푸는 사람. 즉, 필요한 것을 해주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어떤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할까요?

언제나 우리의 친구 되신 예수님.

우리를 질책하지 않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예수님.

우리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통하여 생각 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율법 교사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또 더 깊게 알아가는 파워스톰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고, 함께 했던

사마리아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는 파워스톰이 되게 인도해 주세요.

이제껏 우리의 이웃과 친구들 가족, 선생님 등 주변 사람들에게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00,00,00,00가 되고 싶습니다.

오늘 이 시간 각자 결심하고, 생각한 것들이 있다면,

지킬 수 있도록 인도해주세요.

또 결심하거나, 생각하지 못하였다면,

생각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세요.

우리에게 그렇게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Posted by 은기
2008. 3. 22. 12:42

070931

본문 : 옙 2:8-10(봉독), 창 1:1-31

[8] 여러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9] 구원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님은, 아무도 그것을 자랑할 수 없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10]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목적 : 하나님께서 창조 하신 목적을 살펴서, 정체성 찾기를 시도하고, 생명 나무적 논리 접근을 한다. 또한 하나님의 작품으로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살핀다. 고3에게는 수능만이 아닌, 미래의 방향성을 설명하고, 중1에게는 자아. 나의 작품은 무엇인지 생각해보도록 한다.

하나님의 작품으로 산다는 것.

사진인데요. 어떤 사람의 작품인지 아는 사람이 있나요?

추상화가 몬드리안의 작품으로 composition 으로 구성, 조화를 말하는 그림입니다.

조각가 로댕의 작품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의 이름 뒤에 들어가는 단어가 있습니다. 오늘의 설교 제목과도 연관되는 것인데요. 작품입니다. 작품이라는 단어는 사전적 의미로는 예술 활동으로 얻어지는 결과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든지, 건물을 짓기 위하여 몇 날 며칠 동안 건물에 공을 들인 과정과 동시에 결과적으로 완성된 건물을 모두 이르는 말입니다. 즉, 아주 힘들게 만들어 낸 것의 결과가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작품이라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나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그림을 보았는데, 이게 본래는 조각품입니다. 우리가 비누 조각이나 어떤 조각을 해 본 경험이 있나요? 저는 미술을 굉장히 못하고, 만드는 것에 자신이 없습니다. 어쨌거나 조각을 잘하는 사람이든, 못하는 사람이든, 공을 들여야 잘 되었든 못 되었든 작품이 나온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 읽은 성경 말씀에서도 작품이 나옵니다. 어떻게 나오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나옵니다. 그 작품들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작품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해봅시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학교에서 물건을 잃어버린 적이 참 많았습니다. 때때로 도둑들이 어쩜 그리도 많은지 새로 산 책, 새로 산 펜 등 이런 사소한 것부터 돈지갑까지 잃어버린 경험이 한번쯤은 있을 것입니다. 만약 중요한 물건이 있는데, 교실에 두고 갈 때, 정말 친한 친구에게 물건을 맡깁니다. 그리고 나 올 때까지 잘 맡아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달리 말하면 그 친구는 그것을 누군가가 훔쳐가지 않게 지켜주기 때문에 믿고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물건을 보호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했나요?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 있음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그 선물이 뭘까요? 구원입니다. 구원이라는 말의 본래 어원은 ‘위험과 파괴로부터 구출하다’, ‘안전하게 지키다’ 라는 것입니다.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친구에게 물건을 믿고 맡겼기 때문에 물건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들을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이 세상에서 죽을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모르는 불안한 현실입니다. 모든 것을 짜증나고 귀찮아하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 자신을 언제 어떻게 잃어버릴지 모릅니다. 소크라테스가 유명한 말을 남겼지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남겼을 만큼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나를 모르고, 나의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나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물건을 믿을만한 사람에게 맡겼듯, 우리의 삶을 맡기면서 우리의 과제를 해결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불안한 삶을 가장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의 마음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굉장한 어떤 것을 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왜 믿을 수 있게 만드셨을까요?

10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만드셨다고 나와 있습니다. 선한 일이라는 것은 영어로 good works입니다. 좋은 일입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내용이 담긴 부분인데, 그 중 일부분을 살펴보겠는데요. 우리 사람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합니다. 이것은 영어로 It was good! 이고, 여기서도 ‘good’은 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말했습니다. 작품을 만드시고 스스로 감탄하십니다. 앞서 말했듯, 예술가들의 작품은 공을 들인 결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보기에 좋았을 상태로 공을 들여서 만드셨습니다. Good인 상태! 우리는 모두 Good입니다. 옆 사람들의 good을 한 번씩 웃어주면서 봅시다.

우리를 만드신 목적은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이고, 우리를 만드시고, Good! 이라고 하셨다면, 좋은 일은 무엇일까요? 10절의 마지막에도 ‘이렇게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바꾸어서 생각해보면 우리를 만드신 것은 선한 일을 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선한 일. 좋은 일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어떤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앞서 말했습니다. 그냥 우리의 삶을 믿고 맡기기만 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우리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선한 일이라는 것은 왜 우리를 나를 00를........만드신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들이 아주 공들여 만든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일. 보시기에 좋았더라! 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 작품답게 살아봅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일 하는 것을 바라고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만을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의 작품성을 인정합시다!

솔직하게 저도 제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 때 괴롭습니다. 제 인격이 백만 개는 되는 것 같고, 잘하는 것들도 없는 것 같고, 실수투성이입니다. 미래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제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습니다.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작품. 공들여서 만든 작품으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던 그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잃어버릴 내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친구에게 중요한 물건을 믿고 맡기듯, 말입니다.

우리를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하나님!

우리에게 여러 자리 선물을 주셨다고 하신 하나님!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것 같이 잊고 살 때가 너무 많고,

때로는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을 작품으로 만드신 하나님!

믿음으로 구원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하나님!!

우리들이 구원받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더 하나님께 모든 것들을 잘 믿고 맡길 수 있는

우리 파워스톰이 되는 것을 꿈꿔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 작품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작품답게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세요.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 뿐이라는 것도

알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한 걸음 한 걸음이 더 하나님의 멋진 작품답길 바랍니다.

하나님 우리를 작품으로 만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