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설교'에 해당되는 글 13건

  1. 2008.03.22 [070826]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니야”
  2. 2008.03.22 [070729] 99+1=1 100-1=1
  3. 2008.03.22 [첫 설교] 070625 완성의 과정
2008. 3. 22. 12:36

070826

본분 : 창32:23-32

목적 : 진정한 축복의 의미는 무엇이며, 축복은 어떻게 받을 수 있으며,

그 축복을 어떻게 누릴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니야”

씨름하여 축복으로 이끄는 자가 되자

리쌍의 노래 중에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니야’라는 노래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박종천 군의 협찬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리쌍의 노래 중에 그런 가사가 있습니다.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니야.또 내가 걷는게 걷는게 아니야”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헤어진 연인과 슬픔을 말하는 노래에서 말하는 외로움과 괴로움을 나타낸 노래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외로움과 괴로움을 겪는 인물이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볼 야곱입니다.

야곱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야곱의 이름의 뜻은 말꿉치를 잡음 또한 거짓말입니다. 그는 지기를 싫어하는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아주 오랜 옛날에는 장자. 첫째들에게만 주는 축복이 있었습니다. 지기 싫었던 야곱은 첫째들만 받을 수 있는 축복까지도 형 에서에게서 빼앗은 인물이었습니다.

야곱은 형에게 용서를 구하러 떠납니다. 형을 만나기 전 날, 밤을 새면서 기도하는 야곱의 이야기가 오늘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야곱의 형 에서는 야곱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형에게 첫째들이 받은 축복을 누리던 야곱은 형에게 어떤 마음일까요?

야곱이 미리 심부름꾼을 보내서, 형 에서가 야곱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아보았습니다. 심부름꾼은 야곱에게 이렇게 전합니다. 32장 6절에 보면, 그분은 지금 부하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 어른을 치려고 이리로 오고 있습니다." 그런 에서의 모습을 보고, 야곱은 32장 11절에서 “형이 와서 저를 치고, 아내들과 자식들까지 죽일까 두렵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형 에서는 400여명을 데리고 야곱을 죽이러 온다는 말을 들으면서, 충격적인 말을 들으면서, 형에게 가기 전날의 사건이 오늘 우리가 읽은 부분의 내용입니다. 형에게 주려하는 선물은 야곱에게 있어서 재산과 다를바 없을만한 것 입니다. 그것을 미리 보내고, 가족들도 강을 건너기 전의 장소에 두고 홀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기도하던 중, 야곱은 24절에 어떤 사람과 씨름을 한다고 했지만, 30절에 하나님과 대면하여 라는 말을 보아, 하나님과 야곱은 씨름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어떤 상황에서 씨름을 합니까?

형 에서는 400여명을 이끌고, 야곱을 죽이러 오고 있고, 자신의 소유와 다름없는 재산을 미리 형이 있는 곳으로 보내고, 가족들은 강 건너편에서 자고 있는 상황입니다.

홀로 사막 한 가운데서 밤을 지새우는 야곱의 마음이 어떨까요?

아까 들어보았던 리쌍의 노래와 같은 엇비슷한 마음일 것입니다.

웃고 있어도 웃는 상황이 아니고, 걷고 있어도 걷는 것이라고 생각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하지는 않은지는 않은가요? 물론 즐거움과 행복이 있지만, 항상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상황으로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늘 똑같은 시간표에 따라서 살아가는 날들 속에 외로움이 있을 것입니다. ‘짱나는 생활’일 때도 있습니다. 그 짱나는 생활이 야곱의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야곱은 무엇을 했습니까?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야곱은 무엇을 했나요?

사막에서 밤새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씨름을 했습니다.

야곱이 앞에서 어떤 사람이라고 했지요? 승부욕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밤새도록 그 사람과 허벅지 관절이 다치도록 씨름을 하였습니다.

28절에 보면 “자기에게 축복해 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라고 그 사람에게 요구합니다. 축복이라는 말의 뜻이 뭘까요?

영어로는 Blessing입니다.

어떤 뜻일까요? 야곱이 구하는 축복은 어떤 축복일까요?

우선 한국말로 축복이라는 말은 ‘행복을 빎’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축복이라는 말은 바라크(

Posted by 은기
2008. 3. 22. 12:34

070729

본문 : 마태복음 18:12-14, 누가복음 15:3-6

목적 : 목자를 쫓는 양의 마음과 양을 돌보는 목자의 마음 어떤 것인가?

하나님 나라는 양적인 것일까? 질적인 것일까?

아흔 아홉 마리를 두고 한 마리 양을 찾으러 갈 수 있는 목자의 마음은?

99+1=1 100-1=1

양을 본 적이 있었던 사람이 있나요? TV나 동물원이나 어디서든 보았던 사람이 있나요?

저는 양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이 성경과 가장 흡사한 지역에서 양을 보았던 경험을 먼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2005년 1월, 인도에 배낭여행을 갔었을 때, 히말라야 산맥의 한 줄기에서 양과 그 양을 키우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사진 제시)

이곳은 해발 1200M의 고지대로 산소가 부족하여,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찬 지역입니다. 고산병에 대하여 들어보았던 적 있나요? 저와 같이 여행을 했던 사람이 그 고산병에 걸려서 고생을 했을 정도로 높은 지대입니다. 참고로 한라산의 높이가 해발 1950M인데, 그것보다 낮은 곳의 지대라고 생각하면 좋을 듯 합니다.

제가 보았을 때, 양들은 길이 아닌 곳 같은 곳을 가는데, 목동을 따라서 움직입니다. 또 한, 목동은 위험할 것 같은 상황을 만나면, 바로 그 길로 가지 못하게 이렇게 인도합니다. 참 높은 지대이기 때문에, 혹여 떨어지면, 바로 낭떠러지에 떨어집니다. 그런데 이 무리들이 움직이는 광경을 한 시간 정도 앉아서 보았는데, 그들이 움직인 것에 비하면, 아주 짧게 보았지만, 아주 안전하게 산을 넘어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양을 키우는 장소는 팔레스틴의 고원 지대입니다. 이 고지는 해발 5백 미터로 일단 양이 목자를 떠나 길을 잃어버리면 사고를 당하기 쉬운 곳입니다. 제가 인도에서 보았던 양이 이동하였던 장소들과 흡사한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팔레스틴의 목자(牧者)들은 저녁이 되면 우리(fold)로 몰아넣을 때 잃어버린 양이 있나 없나를 확인하기 위해 반드시 양떼를 세어 보았는데 만일 단 한 마리의 양이라도 없을 경우 목자는 그 양을 찾아 온 지역을 찾아 다녔다고 합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비유를 통하여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양으로서, 또한 목자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앞서 제가 양을 보았던 경험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양들은 목자를 무조건적으로 쫓아갑니다. 제가 보기에 길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길로 가는데, 양들은 그저 따라갑니다. 양을 돌보는 목자들은 양이 고지대에서 혹여 떨어질까 안전한 길로 인도합니다. 앞서 이야기 했지만, 양과 목자의 조화는 환상이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이렇게 환상적인 조화가 한 마리의 양이 길을 잃어버린다는 가정에서부터 시작합니다. 12절 초반에서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어떻게 생각하니?’입니다. ‘잃어버린다’의 본래 의미는 벗어나다, 파멸하다(막18:12, 눅 15:4)입니다. 양이 길을 ‘잃어버렸다’ 라기 보다는 양이 목자의 길을 쫓지 못하고, 혹은 양이 마음대로 그 길을 벗어나서 움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본문에서는 자신을 따라오지 않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를 볼 수 있습니다. 앞서서, 팔레스틴 목자들은 저녁이 되면 우리에 넣고, 양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고, 양이 없다면 양을 찾아 나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본분에 등장하는 목자는 12절 ‘산에 그대로 둔 채’ , 영어 성경에서는 pasture(방목하다)하고,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아흔 아홉 마리 양을 어떻게 그대로 두고 떠날 수 있을까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보다 아흔 아홉 마리 양이 중요하지 않아서 일까요?

그래서 한 마리의 양만 안전하게 인도하고,

아흔 아홉 마리 양은 안전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일까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 무리들은 산에 그대로 두어서, 풀어 놓아도, 길을 잃지 않고, 안전하게 있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그 인도를 벗어나지 않고, 따라왔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주었던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은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나갈 수 있게 하였습니다. 찾으러 갔을 때도, 목자가 만약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이 걱정이 되었다면, 잃어버린 양을 제대로 찾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이 목자에게 주었던 믿음이 어떠한 가요?

잃어버린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의 마음을 생각해 봅시다. 목자는 목자의 인도대로 움직이지 않은 양을 찾아 나섭니다. 13절에 보면, ‘만일 찾으면’ 이라는 만일은 If의 가정형 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을 수도 있고, 찾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목자에게 있어서, 찾고, 찾지 못하고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마리 한 마리의 양 그 자체가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양을 향한 목자의 마음을 살필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은 자신이 보호해 주어야 할 양에 대한 마음이었습니다. 백 마리 중에 한 마리는 정말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목자에게 있어 한 마리는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흔 아홉 마리보다 더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목자가 인도하는 길을 벗어나서, 헤매이고 있을 양의 생명입니다. 또한 자신이 생각하는 안전한 길로 인도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찾고, 또 그렇게 인도하려 애쓸 것입니다. 그것이 목자의 마음입니다.

여기서 목자를 예수님이라고 생각하고, 양을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우리는 어떤 양의 모습을 하고 있나요? 앞서 보았듯, 목자에게 있어, 아흔 아홉 마리 양과 길을 벗어난 한 마리의 양은 모두 목자가 안전하게 돌보아야 하는 똑같은 양입니다. 그러나 목자는 안전하지 못한 양을 안전할 수 있게 찾아다니며, 안전하게 인도하려 합니다. 목자는 아흔 아홉 마리 양들에게 산에 안전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두고 갔습니다. 아흔 아홉 마리 양들은 그 믿음으로 길을 벗어난 양들을 찾을 수 있게, 목자에게 도움을 줍니다. 이는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배려에 도움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길을 벗어난 한 마리의 양은 이 믿음을 발견할 수 있게 하면, 완전한 한 몸이 될 수 있게 돕습니다. 양 한 마리 한 마리는 목자에게 있어서는 똑같이 돌보는 양입니다. 이 모두는 한 몸이었습니다. 목자와 양 모두는 하나였습니다.

아흔 아홉 마리 양들의 모습처럼 목자에게 믿음을 심어 주느냐. 길을 벗어난 양의 모습으로 목자가 찾아야 할 더 안전한 길로 인도 받아야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예수님 앞에서 모두 똑같은 양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예수님의 마음을 살피는 것입니다. 목자가 양에 대해 생각하는 마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목자는 언제나 양의 안전으로 돌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작은 문제에서부터 큰 문제에 이르기까지 갈팡질팡 고민합니다. 아니면, 너무 즐겁고, 행복해서 즐거운 생활을 합니다. 또한 그러한 즐거운 것들만 하고 싶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매우 당연합니다. 이러한 당연함 속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들의 목자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늘 안전하게 인도하고 늘 돌보아 주심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혹여, 그 예수님의 힘이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그 안전함이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어서 힘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믿음을 주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이든, 길을 벗어나 안전하게 인도받아야 할 한 마리의 양이든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이 모두는 한 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모두는 목자의 인도함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이 비유로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어떠한 양의 모습인가요? 이 질문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양의 모습이든지 우리 파워스톰 한 사람 한 사람들이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길을 벗어난 양의 모습으로 방향을 찾지 못 하고 있다면, 어디선가 안전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하여 우리를 찾고 있을 그 목자를 찾아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친구나 주변 사람들이 길을 벗어난 양의 모습으로 힘겨워하는 한다면, 목자에게 믿음을 주었듯,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의 모습으로서, 우리는 그 친구나 주변 사람에게 힘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목자의 마음을 기억하며, 우리의 삶의 목자 되신 예수님을 늘 찾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우리를 늘 지켜주시는 예수님!!
오늘 우리는 목자의 인도함을 받는 양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어떤 양의 모습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의 목자되심을 늘 기억하는 양들이 되고 싶습니다.
그렇게 인도하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혹여 우리들과 우리의 친구들이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그 길을 벗어난다면, 그 길에 갈 수 있도록 알게 하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언제나 예수님이 우리의 삶 속에 함께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들의 작은 마음의 소리들도 기억하여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은기
2008. 3. 22. 12:30

[첫 설교] 070625

본문 : 요 5:1-10

목적: 우리는 어떤 예수님을 바라 보고 있는가?

예수님은 베네스다 연못에서 무엇을 하셨는가?

완성의 과정

삶 속에서 우리는 이루어야 할 목표들을 가지고 있고, 그 힘을 기르기 위한 과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하기 싫은 공부와 학교를 다니는 것은 원해서 하기 보다는 어떠한 우리의 무기를 만들고 있는 장소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어떠한 무기들을 만들 수 있는지 성경 본문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고 싶습니다.

성경 말씀에서 살펴 보고자 하는 것은 누가 어떻게 병을 낳았느냐? 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베네스다 연못에서 연못에 들어가지 못한 그 38년 병자를 왜 고치셨는지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의 이야기에서 ‘베네스다’ 라는 연못에서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움직이게 하면,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던지 낳는다고 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물이 움직임을 기다리다가 연못에 앞 다투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38년된 병자는 병이 낳고자 하기를 바랬기 때문에, 그 연못 행각에는 있었습니다. 행각이라 함은 강가 평상 같은 연못가에 쉴 수 있는 공간입니다. 그런데 앞 다투어 들어갈 때, 병자는 움직일 수 없었고, 연못가에 넣어주는 사람들도 없었기 때문에, 그저 연못 만을 바라보면서 누워있었습니다.

병자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우리의 상황 속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다른이 사람들들은 병이 낳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서로 병을 낳기 위하여 자신의 힘을 가지고 달려갑니다. 그러나 그러한 힘조차 갖고 있기 못한 병자에게는 그 목표의 근처에 조차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이 있었나요?

그러면 도대체 ‘베네스다’라는 뜻은 무얼까요?

그럼 어느나라 말일까요?

베네스다라고 써있으니깐 한국말?! ^^

히브리어의 뜻은 ‘은혜의 집’ ‘자비의 집’이라는 뜻을 말합니다. 은혜와 자비라는 말의 뜻은 뭘까요? 그런 집은 어떨까요? 한마디로 아주 정을 주고 받는 집이라는 이미지입니다.

우리도 성경을 읽으면서, ‘베네스다’ 라는 연못은 병을 고칠 수 있는 연못이라는 장소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히브리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충분히 ‘은혜의 집’ ‘자비의 집’이라는 연못의 뜻의 의미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은혜와 자비라는 단어의 뜻을 알았듯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그 의미 보다는 병을 고칠 수 있는 연못이라는 것만을 모두 믿고 그렇게 나왔습니다. 38년 된 병을 고침 받은 사람조차 연못에 병을 고치러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네스다에 연못에 들어간 사람이 아닌, 홀로 연못을 바라보고 실망한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셔서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38년 병을 앓고 있던 사람에게 가셨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은혜가 있는 집과 자비가 있는 집에서는 서로 앞 다투어 병 고치러 들어갈 수 있을까요?

38년이나 병상에 누워 외로운 삶을 보내고 있는 사람을 홀로 두고, 움직일 수 있는 자신만, 혹은 내 가족과 내 친한 친구만을 연못에 넣어 줄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은혜의 집’ ‘자비의 집’ 이라는 뜻을 기억하시며, 그 병자에게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병을 낳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자비의 집이라는 그 뜻을 기억하시면서, 그렇게 베네스다 연못을 바라 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베네스다 연못을 어떻게 보았나요? 병만 고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앞 다투어 그 연못에 들어갔습니다.

우리 파워스톰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베네스다 연못, 즉 은혜와 자비가 넘치는 삶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 왜? 베네스다의 연못에 누워있는 38년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마음만가지고 예수님을 생각만 하더라도, 병을 고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홀로 외로이 있다고 하더라도, 학교에서 집에서 몸을 움직일 힘조차 없고, 자신의 목표도 막상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시험이라는 일주일의 기간을 위해 그 점수를 위해 살아가는 우리의 현 주소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러한 우리의 주어진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들만 생각하려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과에 함께 하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네스다 연못의 뜻을 기억하시며, 그 병자에게 함께 하셨습니다.

시편에서 시편기자는 주님을 [주님은 의로우신 하나님, 사람의 마음 속과 뱃속까지 낱낱이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7장 9절] 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어려움들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어려움을 모르고 계시고, 나의 어려움을 모르고 계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눈에 모이지 않는 과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결과만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결과만이 아닌, 과정과 그 뜻을 다 알고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능력을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힘이 아니라 그 과정과 뜻을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38년 동안 병을 앓고 있던 병자도 은혜의 집이라는 뜻을 기억하면서, 병을 고치려 했을까요? 병을 고치려고 그렇게 연못에 갔지만, 힘이 없어서, 고칠 수 없다는 마음으로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께서 함께 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예수님은 완벽한 결과를 바라시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예수님께 의지하면서, 나아갈 때 그 병을 병자가 고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께 우리의 부족함을 고백하면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부족함을 완성해가는 과정 속에서 예수님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리고, 아직 공부로 바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기 힘들고, 때로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힘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당연합니다. 저도 예배를 드리는 것이 힘들고, 지루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음식이 감사해서 잘 먹겠다는 식사기도도 까먹고, 먹으면서, ‘하나님 맛있는 음식을 주셔서 감사하고, 잘 먹고, 소화 잘 시키겠습니다.’ 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결과를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함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부족한 과정 속에서 자라납니다. 성장 과정 속에서 자신의 어려움을 예수님께 말하면서 그 어려움을 완성하는 파워스톰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려움을 예수님께 말하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그러한 대답들은 어디에 있을까요?

각자, 한 가지씩 예수님께 말하는 것 하나를 생각해 지키는 것을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혼자의 힘이라면 아주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힘이 여러분의 삶 속에 존재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는 기도하는 저 반은기가 되겠습니다.

Posted by 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