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2. 20. 15:40
 
Kwok Pui-lan
                                          정연복 역(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들어가는 말
 
아시아의 종교예술에서 원은 서구유럽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상만큼 중요하다. 티베트 불교의 승려들은 신성한 것에 대한 자신들의 시각화를 강화하려고 모래로 만다라를 만든다. 부처의 평온한 모습은 원들과 동심원들을 사용하여 묘사하는데, 이 원들은 마음의 평화, 자비, 그리고 완전을 상징한다. 힌두교의 신화와 종교예술에서는 인간의 고통과 유한성을 드러내기 위해 환생(還生)이라는 강력한 상징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육지 가까이 사는 사람들은 늘 달과 별의 운행을 순환적인 방식으로 묘사해왔다.

원의 이미지는 생물학적인 면과 상징적인 면 모두에서 여성들에게 있어서도 중요하다. 여성의 몸은 의미심장한 호르몬 및 생리적 변화를 동반하면서 주기적인 순환을 따른다. 남성들보다 계절의 순환과 보다 잘 조화를 이루는 여성들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달이 차고 기울 때 의식들을 거행해왔다. 오늘날 여러 영성 모임에 참여하는 여성들은 자신들의 연대성을 드러내기 위해 원을 그려 사라나 하갈의 춤을 추고 자매됨의 친교를 나타내는 원을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다.

계몽주의 이래 서구의 기독교는 시간과 역사를 직선적이고 진행적인 방식으로 이해해왔다.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는 과학과 과학기술의 여러 발전을 통해 강화되었다. 그러나 생태학적 인식을 가진 기독교인들은 계몽주의의 전제들과 과학기술의 가정들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그들은 “재활용”을 의미심장한 생태학적 및 영적 주제로서 재발견했다. “당신은 기독교인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에, 『묵시에서 창세기까지: 생태학, 페미니즘, 그리고 기독교』의 저자인 프리머베시는 자신이 “재활용된 기독교인”이라고 답한다.

아시아인들과 전 세계의 여성들과 양심적인 기독교인들은 거룩한 것과 자연 과정(원, 순환, 그리고 재활용)에 대해 말할 때 갑작스럽게 공통언어를 발견한다.

1. 생태학과 여성의 관심사들
 
오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생태계의 위기는 인간과 모든 지각 있는 생물들, 그리고 자연을 잇는 거대한 사슬이 끊어진 결과다. 이런 상호 연관을 무시한 데 기인하는 생태계 균형의 파괴는 이 사슬 중에서도 가장 약한 연결고리인 제3세계의 영성과 아이들에게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산림 황폐화, 산성비, 토양침식, 그리고 비료와 살충제의 무분별한 사용은 대부분의 여성과 아이들이 의존하고 있는 경제, 즉 지역의 살림살이 경제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날로 점점 더 많은 수의 여성이 공장에서 값싼 노동자로 일하기 위해 도시로 몰려들고 있는데, 그들 중 일부는 결국 날로 번성하는 섹스산업에 자신의 몸을 파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본국에서 직장을 구할 수 없는 또 다른 여성들은 미국의 멕시코만에 연한 5개 주(Gulf states)나 그밖에 새로 산업화된 나라들에서 일자리를 구하려 애쓴다. 이런 이민 노동자들의 상당수가 착취당하고 있으며 또 일부는 성적으로 학대받고 있다.

제3세계 여성들은 산업과 과학기술의 성장에 기초한 발전모델들에서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한다. 사실 그들은 소위 “국가발전”이나 “경제기적”을 위해 혹독한 인간적 희생을 치러왔다. 여성들의 생산적인 노동력과 성은 착취당한다. 여성들의 삶은 과학기술의 감시, 국가 및 기업의 통제에 더욱 더 종속되어가고 있다.

제3세계 여성들은 인구폭발 및 인간과 천연자원 사이의 불균형을 초래한다는 비난 또한 받고 있다. 새로 개발한 약제들과 피임기구들은 제3세계 여성들을 실험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그들 중 많은 수의 여성이 불임을 강요당해왔다. 초음파검사 같은 과학기술의 발전들은 여성 태아의 선택적 유산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낳는다. 최근의 인구통계학 연구에 따르면 이런 식으로 전 세계에서 실종된 여성이 무려 1억에 달하는데, 그 가운데 60%가 아시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과학기술의 통제를 받는 서구지향적 발전모델과 가부장제는 주변화된 여성들의 삶을 지배하는 “사악한 삼위일체”(unholy trinity)를 형성한다. 1992년 나이로비에서 열린 제3세계 신학자들의 에큐메니컬 모임에 참가한 사람들은 여성을 비인간화하는 가부장제 구조들을 비판했다. 이 구조들은 여성들의 제반 권리, 그리고 경제적 및 정치적 자유를 부정하며 여성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낳기 때문이다. 그러한 억압들은 종종 가부장제 종교들, 남성 중심적 언어와 표현들, 그리고 고전문학과 성경에 대한 남성 편향적 해석에 의해 묵인되거나 강화된다. 여성해방 철학자인 매리 데일리(Mary Daly)는, 이제 여성들은 “여성 생태학”, 즉 여성들의 복지와 성장에 유익한 환경에 대해 말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2. 기독교의 재활용
 
생태계의 위기와 여성들의 지위 격하는 과연 기독교가 내적인 연관과 상호성, 그리고 생태정의(eco-justice)를 증진시켜왔는지 깊이 반성해 볼 것을 우리에게 촉구한다. 생태계의 문제를 의식하는 많은 기독교인들은 인간 중심적, 위계질서적, 그리고 가부장제 종교제도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기는커녕 바로 문제의 일부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의 전통적인 기독교적 신념들 중 어떤 것은 재활용의 과정을 거쳐 현대 세계에 맞게 새롭게 사용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전통에서 “재활용”이란 개념은 새로운 게 아니다. 회심, 회개, 그리고 심지어 부활이라는 종교적 주제들까지도 우리에게 재활용의 의미를 상기시킨다.
 
(1) 위계질서적 모델에서 생태학적 모델로

여성해방 신학자들은 하나님과 세계에 대한 이원론적, 위계질서적 이해야말로 서구 기독교가 안고 있는 문제의 뿌리임을 이미 오래 전부터 지적해왔다. 존재의 위계질서는 하나님을 인간보다 무한히 위에 놓으며, 마찬가지로 인간을 자연보다 위에 놓는다. 이런 이원론적 세계관은 정신과 육체, 남성과 여성, 그리고 인간과 인간 이외의 세계를 엄격히 분리시킨다. 따라서 한 개인이나 자연물의 가치는 그것의 본질적 가치나 존엄 대신에 위계질서 안에서의 그것의 위치에 따라 결정된다. 생태학적 모델은 하나님을 이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는 분으로, 그리고 인간 위에 존재하는 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자연은 상호 의존적이며 상호 관련된다. 한 원의 각 점이 원의 중심 및 원의 다른 점들과 관련되는 것과 똑같이, 세계에 대한 이원론적 이해는 이제 상호 연관적이며 전체적인 이해에 자리를 내주지 않으면 안 된다. 생태학적 모델은 생물권(biosphere)에서의 다양성을 가치 있게 여기며 인종, 성(性), 성적 태도에서의 다양성을 존중한다.
 
(2) 인간중심주의에서 생물중심주의로

서구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우주의 중심에 위치한다. 전체 피조계는 인간의 이익을 위해 창조되었으며, 따라서 인간은 고기와 새, 땅 위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고 지배해야 한다. 이 피조계는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정죄당하고 저주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간은 구원의 가능성을 부여받는다. 그리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의 의무를 떠맡음으로써 지구를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구와 생물권의 이야기를 통해 피조계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이해할 수도 있다. 토마스 베리(Thomas Berry)에 따르면, 지구라는 혹성은 약 100억 년 전에 생겨났고, 그후 70억 년이 지난 후에 지구에 생명체가 생겨났다. 식물들은 약 6억 년 전에, 그리고 동물들은 그보다 조금 후에 처음 출현했다. 인간의 의식이란 것은 겨우 약 2백만 년 전에 등장했다. 이렇듯 생물권은 우리보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20세기 들어 생물학자들은 이 생물권이 얼마나 복잡한가를 이제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했다. 지구가 전적으로 우리의 처분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고, 또 드넓고 거대한 은하계의 구원이 겨우 50억의 인간에게만 달려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교만한 일이다.

서구의 인간중심주의에서는 하나님을 인간의 형상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한다. 하나님은 왕, 아버지, 재판관, 그리고 용사다. 하나님은 인간의 사건들에 개입하는 역사의 주님이다. 이와 반대로, 동양인들과 흙에 매여 사는 토착민들은 신적인 것, 곧 도(道, Tao)를 말없고 비침입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존중과 경외의 마음을 갖고 땅을 어머니, 생명을 지탱하고 긍정하는 어머니라고 말한다. 인간중심주의에서 생물중심주의로의 전환은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는 방식의 변화 또한 반드시 필요로 한다.
 
(3) 수동적(소극적) 영성에서 열정적(적극적) 영성으로

올바른 영성을 추구하는 것은 생태계의 위기에 직면한 우리에게 점점 더 긴박한 일이 되어왔다. 과거에는 영성은 금욕주의, 영적인 훈련, 명상, 기도, 그리고 현실을 등진 채 내세를 추구하는 것과 동의어로 여겨졌다. 이원론적인 세계관에서는 영혼은 몸, 감정, 그리고 식욕과 반대된다. 이제 우리는 전체적이며 생명을 사랑하며 구체적인 영성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다. 이 새로운 영성은 수동적(소극적)이고 감정이 없기는커녕 오히려 열정적이며 성적(性的) 활기로 충만해야 한다. 이 영성은 우리가 충만한 잠재력을 갖고 살며, 우리의 모든 관계에서 정의를 추구하며, 그리고 하나님 및 어머니 땅과 더불어 겸손하게 살아가도록 이끌어야 한다. 우리가 낙하하는 별과 가을의 나뭇잎들과 아침 이슬을 볼 때, 이 영성은 우리 마음에 경이와 경외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이 새로운 영성은 우리가 평화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평화는 그저 전쟁이나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평화는 정의로운 관계들에 기초한 조화와 번영, 그리고 더 없는 행복이다. 평화는 정치가와 전략가들이 우리를 위해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내도록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평화는 무기력한 자들에게 권능을 주고, 약한 자들을 강하게 하고, 잘못되어 가는 일들을 바로잡기 위해 우리의 지역사회에서 열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3. 1990년대의 새로운 연대성
 
1990년대 들어 교회들이 직면하고 있는 도전은 정의와 평화와 창조질서 보전을 위한 우리의 헌신의 시야를 넓히고 심화시키는 것이다. 에큐메니컬 운동이 맨 처음 취했던 비전은 교회의 증언과 전도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교회 일치를 증진시키는 일이었다. 1970년대에 서로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보다 광범위한 인간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하나의 단계로서 종교간의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 우리의 에큐메니컬 운동은 교회적 연대성에서 생태학적 연대성으로 옮겨가지 않으면 안 된다.

"연대성"(solidarity)이라는 단어는 프랑스의 법률 전통에서 유래했는데, 동일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결속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후에 기독교 노동운동가들이 이 단어를 사용했는데, 마르크스는 이것을 압제받는 자들이 스스로를 조직화하는 것으로서 이해했다. 유럽에서 이 단어는 강력한 정의(正義)의 전통을 함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아시아인들은 “연대성”을 다소 다른 의미로 이해한다. 중국에서 그것은 하나로 모이는 것, 그리고 서로 연결되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하나의 집단으로 묶여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동양의 언어들에서 그 단어는 만물이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태학적 인식을 불러일으킨다.

생태학적 연대성은 여성들과 연대하는 교회들의 에큐메니컬 10년(Ecumenical Decade of the Churches in Solidarity with Women; 1988-98)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세계교회협의회는 교회들이 교회와 지역사회에서의 여성들의 완전한 참여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인종차별과 성차별과 계급차별에 맞서 싸울 것을, 정의와 평화와 창조질서 보전을 위해 투쟁하는 여성들의 관점과 행동들에 분명한 비전을 줄 것을 촉구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제3세계 여성들은 정의와 인간의 권리와 자유와 창조질서 보전을 위한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왔다. 제1세계에서도 여성들은 평화운동과 녹색운동을 위한 가장 열렬한 지도자들과 환상가들의 대열에 끼어 있다.

생태학적 연대성은 속죄양들을 찾아나서고 새로운 희생자들을 만들어내는 대신에 상호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토착민들은 수세기에 걸쳐 자기네가 자신들의 땅에서 생존 수단은 물론 삶의 의미를 박탈당해왔음을 거듭 말한다. 핵폭발 실험, 방사선 폐기물을 아무데나 내다버리는 일과 핵무기 축적이 저 멀리 유럽과 태평양 연안의 북미에서 계속되는 한, 우리의 세계는 더 이상 안전하지 못할 것이다. 독성 폐기물들이 오클라호마의 오세이지족(Osage nation) 거주지와 남부 다코타의 로즈버드 수족(Sioux, 아메리카 인디언의 한 종족/역자 주) 거주지에 마구 내다버려지는 한, 우리의 도시들 역시 그곳들에 못지않게 위험할 것이다. 우리가 다음 세대들에게 우리가 진 빚을 갚도록 또 우리가 불러일으킨 혼란을 책임지도록 요청하지 않는 한, 우리의 생활은 결코 풍요롭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고 있으며, 따라서 한 생태계의 파괴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생태학적 연대성은 땅, 바다, 산림, 강들, 그리고 산들과 우리 사이의 계약이다. 만약 산들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눈을 그 어디를 향해 들어올려 도움을 청할 수 있을까(시편 121:1)? 만약 들의 나무들이 없다면, 우리가 기뻐 뛰며 밖으로 나갔다가 평화로운 마음으로 돌아올 때 누가 박수를 쳐줄 것인가(이사야 55:12)? 만일 우리가 홍해를 오염시킨다면, 하나님조차도 권능의 기적들을 행하지 못하실 것이다. 자연은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고 천연자원들은 제한되어 있다는 이유로, 자연과 우리 사이의 계약이 두려움과 근심에 기초하고 있지는 않다. 우리는 지구라는 행성과의 우리의 계약을 기쁨과 경축과 감사의 마음으로 새롭게 갱신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연, 그리고 자연 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Kwok Pui-lan, Ecology and the Recycling of Christianity, in: Ecotheology: Voices from South and North, ed., David G. Hallman, Orbis Books, Maryknoll, New York, 1994, pp.107-111의 完譯이다. 그녀는 어머니이고 이야기꾼이며 신학자이다. 홍콩 출생인 그녀는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정의, 평화, 창조질서 보전에 관한 세계대회(서울, 1990), WCC 제7차 회합(캔버라, 1991), 그리고 1992년 리오에서 열린 지구 정상회담 기간 중에 가진 에큐메니컬 집회에서의 생태계에 관한 에큐메니컬 논의에서 그녀는 활발한 활동을 했다.


출처 :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673

Posted by 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