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3. 22. 12:42

070931

본문 : 옙 2:8-10(봉독), 창 1:1-31

[8] 여러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9] 구원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님은, 아무도 그것을 자랑할 수 없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10]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목적 : 하나님께서 창조 하신 목적을 살펴서, 정체성 찾기를 시도하고, 생명 나무적 논리 접근을 한다. 또한 하나님의 작품으로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살핀다. 고3에게는 수능만이 아닌, 미래의 방향성을 설명하고, 중1에게는 자아. 나의 작품은 무엇인지 생각해보도록 한다.

하나님의 작품으로 산다는 것.

사진인데요. 어떤 사람의 작품인지 아는 사람이 있나요?

추상화가 몬드리안의 작품으로 composition 으로 구성, 조화를 말하는 그림입니다.

조각가 로댕의 작품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의 이름 뒤에 들어가는 단어가 있습니다. 오늘의 설교 제목과도 연관되는 것인데요. 작품입니다. 작품이라는 단어는 사전적 의미로는 예술 활동으로 얻어지는 결과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든지, 건물을 짓기 위하여 몇 날 며칠 동안 건물에 공을 들인 과정과 동시에 결과적으로 완성된 건물을 모두 이르는 말입니다. 즉, 아주 힘들게 만들어 낸 것의 결과가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작품이라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나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그림을 보았는데, 이게 본래는 조각품입니다. 우리가 비누 조각이나 어떤 조각을 해 본 경험이 있나요? 저는 미술을 굉장히 못하고, 만드는 것에 자신이 없습니다. 어쨌거나 조각을 잘하는 사람이든, 못하는 사람이든, 공을 들여야 잘 되었든 못 되었든 작품이 나온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 읽은 성경 말씀에서도 작품이 나옵니다. 어떻게 나오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나옵니다. 그 작품들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작품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해봅시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학교에서 물건을 잃어버린 적이 참 많았습니다. 때때로 도둑들이 어쩜 그리도 많은지 새로 산 책, 새로 산 펜 등 이런 사소한 것부터 돈지갑까지 잃어버린 경험이 한번쯤은 있을 것입니다. 만약 중요한 물건이 있는데, 교실에 두고 갈 때, 정말 친한 친구에게 물건을 맡깁니다. 그리고 나 올 때까지 잘 맡아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달리 말하면 그 친구는 그것을 누군가가 훔쳐가지 않게 지켜주기 때문에 믿고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물건을 보호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했나요?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 있음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그 선물이 뭘까요? 구원입니다. 구원이라는 말의 본래 어원은 ‘위험과 파괴로부터 구출하다’, ‘안전하게 지키다’ 라는 것입니다.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친구에게 물건을 믿고 맡겼기 때문에 물건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들을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이 세상에서 죽을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모르는 불안한 현실입니다. 모든 것을 짜증나고 귀찮아하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 자신을 언제 어떻게 잃어버릴지 모릅니다. 소크라테스가 유명한 말을 남겼지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남겼을 만큼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나를 모르고, 나의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나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물건을 믿을만한 사람에게 맡겼듯, 우리의 삶을 맡기면서 우리의 과제를 해결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불안한 삶을 가장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의 마음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굉장한 어떤 것을 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왜 믿을 수 있게 만드셨을까요?

10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만드셨다고 나와 있습니다. 선한 일이라는 것은 영어로 good works입니다. 좋은 일입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내용이 담긴 부분인데, 그 중 일부분을 살펴보겠는데요. 우리 사람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합니다. 이것은 영어로 It was good! 이고, 여기서도 ‘good’은 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말했습니다. 작품을 만드시고 스스로 감탄하십니다. 앞서 말했듯, 예술가들의 작품은 공을 들인 결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보기에 좋았을 상태로 공을 들여서 만드셨습니다. Good인 상태! 우리는 모두 Good입니다. 옆 사람들의 good을 한 번씩 웃어주면서 봅시다.

우리를 만드신 목적은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이고, 우리를 만드시고, Good! 이라고 하셨다면, 좋은 일은 무엇일까요? 10절의 마지막에도 ‘이렇게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바꾸어서 생각해보면 우리를 만드신 것은 선한 일을 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선한 일. 좋은 일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어떤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앞서 말했습니다. 그냥 우리의 삶을 믿고 맡기기만 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우리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선한 일이라는 것은 왜 우리를 나를 00를........만드신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들이 아주 공들여 만든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일. 보시기에 좋았더라! 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 작품답게 살아봅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일 하는 것을 바라고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만을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의 작품성을 인정합시다!

솔직하게 저도 제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 때 괴롭습니다. 제 인격이 백만 개는 되는 것 같고, 잘하는 것들도 없는 것 같고, 실수투성이입니다. 미래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제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습니다.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작품. 공들여서 만든 작품으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던 그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잃어버릴 내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친구에게 중요한 물건을 믿고 맡기듯, 말입니다.

우리를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하나님!

우리에게 여러 자리 선물을 주셨다고 하신 하나님!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것 같이 잊고 살 때가 너무 많고,

때로는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을 작품으로 만드신 하나님!

믿음으로 구원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하나님!!

우리들이 구원받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더 하나님께 모든 것들을 잘 믿고 맡길 수 있는

우리 파워스톰이 되는 것을 꿈꿔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 작품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작품답게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세요.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 뿐이라는 것도

알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한 걸음 한 걸음이 더 하나님의 멋진 작품답길 바랍니다.

하나님 우리를 작품으로 만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은기
2008. 3. 22. 12:36

070826

본분 : 창32:23-32

목적 : 진정한 축복의 의미는 무엇이며, 축복은 어떻게 받을 수 있으며,

그 축복을 어떻게 누릴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니야”

씨름하여 축복으로 이끄는 자가 되자

리쌍의 노래 중에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니야’라는 노래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박종천 군의 협찬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리쌍의 노래 중에 그런 가사가 있습니다.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니야.또 내가 걷는게 걷는게 아니야”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헤어진 연인과 슬픔을 말하는 노래에서 말하는 외로움과 괴로움을 나타낸 노래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외로움과 괴로움을 겪는 인물이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볼 야곱입니다.

야곱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야곱의 이름의 뜻은 말꿉치를 잡음 또한 거짓말입니다. 그는 지기를 싫어하는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아주 오랜 옛날에는 장자. 첫째들에게만 주는 축복이 있었습니다. 지기 싫었던 야곱은 첫째들만 받을 수 있는 축복까지도 형 에서에게서 빼앗은 인물이었습니다.

야곱은 형에게 용서를 구하러 떠납니다. 형을 만나기 전 날, 밤을 새면서 기도하는 야곱의 이야기가 오늘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야곱의 형 에서는 야곱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형에게 첫째들이 받은 축복을 누리던 야곱은 형에게 어떤 마음일까요?

야곱이 미리 심부름꾼을 보내서, 형 에서가 야곱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아보았습니다. 심부름꾼은 야곱에게 이렇게 전합니다. 32장 6절에 보면, 그분은 지금 부하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 어른을 치려고 이리로 오고 있습니다." 그런 에서의 모습을 보고, 야곱은 32장 11절에서 “형이 와서 저를 치고, 아내들과 자식들까지 죽일까 두렵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형 에서는 400여명을 데리고 야곱을 죽이러 온다는 말을 들으면서, 충격적인 말을 들으면서, 형에게 가기 전날의 사건이 오늘 우리가 읽은 부분의 내용입니다. 형에게 주려하는 선물은 야곱에게 있어서 재산과 다를바 없을만한 것 입니다. 그것을 미리 보내고, 가족들도 강을 건너기 전의 장소에 두고 홀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기도하던 중, 야곱은 24절에 어떤 사람과 씨름을 한다고 했지만, 30절에 하나님과 대면하여 라는 말을 보아, 하나님과 야곱은 씨름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어떤 상황에서 씨름을 합니까?

형 에서는 400여명을 이끌고, 야곱을 죽이러 오고 있고, 자신의 소유와 다름없는 재산을 미리 형이 있는 곳으로 보내고, 가족들은 강 건너편에서 자고 있는 상황입니다.

홀로 사막 한 가운데서 밤을 지새우는 야곱의 마음이 어떨까요?

아까 들어보았던 리쌍의 노래와 같은 엇비슷한 마음일 것입니다.

웃고 있어도 웃는 상황이 아니고, 걷고 있어도 걷는 것이라고 생각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하지는 않은지는 않은가요? 물론 즐거움과 행복이 있지만, 항상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상황으로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늘 똑같은 시간표에 따라서 살아가는 날들 속에 외로움이 있을 것입니다. ‘짱나는 생활’일 때도 있습니다. 그 짱나는 생활이 야곱의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야곱은 무엇을 했습니까?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야곱은 무엇을 했나요?

사막에서 밤새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씨름을 했습니다.

야곱이 앞에서 어떤 사람이라고 했지요? 승부욕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밤새도록 그 사람과 허벅지 관절이 다치도록 씨름을 하였습니다.

28절에 보면 “자기에게 축복해 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라고 그 사람에게 요구합니다. 축복이라는 말의 뜻이 뭘까요?

영어로는 Blessing입니다.

어떤 뜻일까요? 야곱이 구하는 축복은 어떤 축복일까요?

우선 한국말로 축복이라는 말은 ‘행복을 빎’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축복이라는 말은 바라크(

Posted by 은기
2008. 3. 22. 12:34

070729

본문 : 마태복음 18:12-14, 누가복음 15:3-6

목적 : 목자를 쫓는 양의 마음과 양을 돌보는 목자의 마음 어떤 것인가?

하나님 나라는 양적인 것일까? 질적인 것일까?

아흔 아홉 마리를 두고 한 마리 양을 찾으러 갈 수 있는 목자의 마음은?

99+1=1 100-1=1

양을 본 적이 있었던 사람이 있나요? TV나 동물원이나 어디서든 보았던 사람이 있나요?

저는 양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이 성경과 가장 흡사한 지역에서 양을 보았던 경험을 먼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2005년 1월, 인도에 배낭여행을 갔었을 때, 히말라야 산맥의 한 줄기에서 양과 그 양을 키우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사진 제시)

이곳은 해발 1200M의 고지대로 산소가 부족하여,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찬 지역입니다. 고산병에 대하여 들어보았던 적 있나요? 저와 같이 여행을 했던 사람이 그 고산병에 걸려서 고생을 했을 정도로 높은 지대입니다. 참고로 한라산의 높이가 해발 1950M인데, 그것보다 낮은 곳의 지대라고 생각하면 좋을 듯 합니다.

제가 보았을 때, 양들은 길이 아닌 곳 같은 곳을 가는데, 목동을 따라서 움직입니다. 또 한, 목동은 위험할 것 같은 상황을 만나면, 바로 그 길로 가지 못하게 이렇게 인도합니다. 참 높은 지대이기 때문에, 혹여 떨어지면, 바로 낭떠러지에 떨어집니다. 그런데 이 무리들이 움직이는 광경을 한 시간 정도 앉아서 보았는데, 그들이 움직인 것에 비하면, 아주 짧게 보았지만, 아주 안전하게 산을 넘어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양을 키우는 장소는 팔레스틴의 고원 지대입니다. 이 고지는 해발 5백 미터로 일단 양이 목자를 떠나 길을 잃어버리면 사고를 당하기 쉬운 곳입니다. 제가 인도에서 보았던 양이 이동하였던 장소들과 흡사한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팔레스틴의 목자(牧者)들은 저녁이 되면 우리(fold)로 몰아넣을 때 잃어버린 양이 있나 없나를 확인하기 위해 반드시 양떼를 세어 보았는데 만일 단 한 마리의 양이라도 없을 경우 목자는 그 양을 찾아 온 지역을 찾아 다녔다고 합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비유를 통하여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양으로서, 또한 목자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앞서 제가 양을 보았던 경험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양들은 목자를 무조건적으로 쫓아갑니다. 제가 보기에 길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길로 가는데, 양들은 그저 따라갑니다. 양을 돌보는 목자들은 양이 고지대에서 혹여 떨어질까 안전한 길로 인도합니다. 앞서 이야기 했지만, 양과 목자의 조화는 환상이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이렇게 환상적인 조화가 한 마리의 양이 길을 잃어버린다는 가정에서부터 시작합니다. 12절 초반에서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어떻게 생각하니?’입니다. ‘잃어버린다’의 본래 의미는 벗어나다, 파멸하다(막18:12, 눅 15:4)입니다. 양이 길을 ‘잃어버렸다’ 라기 보다는 양이 목자의 길을 쫓지 못하고, 혹은 양이 마음대로 그 길을 벗어나서 움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본문에서는 자신을 따라오지 않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를 볼 수 있습니다. 앞서서, 팔레스틴 목자들은 저녁이 되면 우리에 넣고, 양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고, 양이 없다면 양을 찾아 나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본분에 등장하는 목자는 12절 ‘산에 그대로 둔 채’ , 영어 성경에서는 pasture(방목하다)하고,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아흔 아홉 마리 양을 어떻게 그대로 두고 떠날 수 있을까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보다 아흔 아홉 마리 양이 중요하지 않아서 일까요?

그래서 한 마리의 양만 안전하게 인도하고,

아흔 아홉 마리 양은 안전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일까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 무리들은 산에 그대로 두어서, 풀어 놓아도, 길을 잃지 않고, 안전하게 있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그 인도를 벗어나지 않고, 따라왔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주었던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은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나갈 수 있게 하였습니다. 찾으러 갔을 때도, 목자가 만약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이 걱정이 되었다면, 잃어버린 양을 제대로 찾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이 목자에게 주었던 믿음이 어떠한 가요?

잃어버린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의 마음을 생각해 봅시다. 목자는 목자의 인도대로 움직이지 않은 양을 찾아 나섭니다. 13절에 보면, ‘만일 찾으면’ 이라는 만일은 If의 가정형 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을 수도 있고, 찾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목자에게 있어서, 찾고, 찾지 못하고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마리 한 마리의 양 그 자체가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양을 향한 목자의 마음을 살필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은 자신이 보호해 주어야 할 양에 대한 마음이었습니다. 백 마리 중에 한 마리는 정말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목자에게 있어 한 마리는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흔 아홉 마리보다 더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목자가 인도하는 길을 벗어나서, 헤매이고 있을 양의 생명입니다. 또한 자신이 생각하는 안전한 길로 인도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찾고, 또 그렇게 인도하려 애쓸 것입니다. 그것이 목자의 마음입니다.

여기서 목자를 예수님이라고 생각하고, 양을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우리는 어떤 양의 모습을 하고 있나요? 앞서 보았듯, 목자에게 있어, 아흔 아홉 마리 양과 길을 벗어난 한 마리의 양은 모두 목자가 안전하게 돌보아야 하는 똑같은 양입니다. 그러나 목자는 안전하지 못한 양을 안전할 수 있게 찾아다니며, 안전하게 인도하려 합니다. 목자는 아흔 아홉 마리 양들에게 산에 안전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두고 갔습니다. 아흔 아홉 마리 양들은 그 믿음으로 길을 벗어난 양들을 찾을 수 있게, 목자에게 도움을 줍니다. 이는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배려에 도움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길을 벗어난 한 마리의 양은 이 믿음을 발견할 수 있게 하면, 완전한 한 몸이 될 수 있게 돕습니다. 양 한 마리 한 마리는 목자에게 있어서는 똑같이 돌보는 양입니다. 이 모두는 한 몸이었습니다. 목자와 양 모두는 하나였습니다.

아흔 아홉 마리 양들의 모습처럼 목자에게 믿음을 심어 주느냐. 길을 벗어난 양의 모습으로 목자가 찾아야 할 더 안전한 길로 인도 받아야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예수님 앞에서 모두 똑같은 양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예수님의 마음을 살피는 것입니다. 목자가 양에 대해 생각하는 마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목자는 언제나 양의 안전으로 돌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작은 문제에서부터 큰 문제에 이르기까지 갈팡질팡 고민합니다. 아니면, 너무 즐겁고, 행복해서 즐거운 생활을 합니다. 또한 그러한 즐거운 것들만 하고 싶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매우 당연합니다. 이러한 당연함 속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들의 목자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늘 안전하게 인도하고 늘 돌보아 주심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혹여, 그 예수님의 힘이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그 안전함이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어서 힘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믿음을 주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이든, 길을 벗어나 안전하게 인도받아야 할 한 마리의 양이든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이 모두는 한 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모두는 목자의 인도함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이 비유로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어떠한 양의 모습인가요? 이 질문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양의 모습이든지 우리 파워스톰 한 사람 한 사람들이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길을 벗어난 양의 모습으로 방향을 찾지 못 하고 있다면, 어디선가 안전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하여 우리를 찾고 있을 그 목자를 찾아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친구나 주변 사람들이 길을 벗어난 양의 모습으로 힘겨워하는 한다면, 목자에게 믿음을 주었듯,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의 모습으로서, 우리는 그 친구나 주변 사람에게 힘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목자의 마음을 기억하며, 우리의 삶의 목자 되신 예수님을 늘 찾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우리를 늘 지켜주시는 예수님!!
오늘 우리는 목자의 인도함을 받는 양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어떤 양의 모습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의 목자되심을 늘 기억하는 양들이 되고 싶습니다.
그렇게 인도하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혹여 우리들과 우리의 친구들이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그 길을 벗어난다면, 그 길에 갈 수 있도록 알게 하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언제나 예수님이 우리의 삶 속에 함께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들의 작은 마음의 소리들도 기억하여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은기
2008. 3. 22. 12:30

[첫 설교] 070625

본문 : 요 5:1-10

목적: 우리는 어떤 예수님을 바라 보고 있는가?

예수님은 베네스다 연못에서 무엇을 하셨는가?

완성의 과정

삶 속에서 우리는 이루어야 할 목표들을 가지고 있고, 그 힘을 기르기 위한 과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하기 싫은 공부와 학교를 다니는 것은 원해서 하기 보다는 어떠한 우리의 무기를 만들고 있는 장소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어떠한 무기들을 만들 수 있는지 성경 본문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고 싶습니다.

성경 말씀에서 살펴 보고자 하는 것은 누가 어떻게 병을 낳았느냐? 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베네스다 연못에서 연못에 들어가지 못한 그 38년 병자를 왜 고치셨는지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의 이야기에서 ‘베네스다’ 라는 연못에서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움직이게 하면,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던지 낳는다고 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물이 움직임을 기다리다가 연못에 앞 다투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38년된 병자는 병이 낳고자 하기를 바랬기 때문에, 그 연못 행각에는 있었습니다. 행각이라 함은 강가 평상 같은 연못가에 쉴 수 있는 공간입니다. 그런데 앞 다투어 들어갈 때, 병자는 움직일 수 없었고, 연못가에 넣어주는 사람들도 없었기 때문에, 그저 연못 만을 바라보면서 누워있었습니다.

병자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우리의 상황 속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다른이 사람들들은 병이 낳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서로 병을 낳기 위하여 자신의 힘을 가지고 달려갑니다. 그러나 그러한 힘조차 갖고 있기 못한 병자에게는 그 목표의 근처에 조차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이 있었나요?

그러면 도대체 ‘베네스다’라는 뜻은 무얼까요?

그럼 어느나라 말일까요?

베네스다라고 써있으니깐 한국말?! ^^

히브리어의 뜻은 ‘은혜의 집’ ‘자비의 집’이라는 뜻을 말합니다. 은혜와 자비라는 말의 뜻은 뭘까요? 그런 집은 어떨까요? 한마디로 아주 정을 주고 받는 집이라는 이미지입니다.

우리도 성경을 읽으면서, ‘베네스다’ 라는 연못은 병을 고칠 수 있는 연못이라는 장소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히브리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충분히 ‘은혜의 집’ ‘자비의 집’이라는 연못의 뜻의 의미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은혜와 자비라는 단어의 뜻을 알았듯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그 의미 보다는 병을 고칠 수 있는 연못이라는 것만을 모두 믿고 그렇게 나왔습니다. 38년 된 병을 고침 받은 사람조차 연못에 병을 고치러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네스다에 연못에 들어간 사람이 아닌, 홀로 연못을 바라보고 실망한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셔서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38년 병을 앓고 있던 사람에게 가셨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은혜가 있는 집과 자비가 있는 집에서는 서로 앞 다투어 병 고치러 들어갈 수 있을까요?

38년이나 병상에 누워 외로운 삶을 보내고 있는 사람을 홀로 두고, 움직일 수 있는 자신만, 혹은 내 가족과 내 친한 친구만을 연못에 넣어 줄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은혜의 집’ ‘자비의 집’ 이라는 뜻을 기억하시며, 그 병자에게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병을 낳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자비의 집이라는 그 뜻을 기억하시면서, 그렇게 베네스다 연못을 바라 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베네스다 연못을 어떻게 보았나요? 병만 고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앞 다투어 그 연못에 들어갔습니다.

우리 파워스톰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베네스다 연못, 즉 은혜와 자비가 넘치는 삶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 왜? 베네스다의 연못에 누워있는 38년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마음만가지고 예수님을 생각만 하더라도, 병을 고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홀로 외로이 있다고 하더라도, 학교에서 집에서 몸을 움직일 힘조차 없고, 자신의 목표도 막상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시험이라는 일주일의 기간을 위해 그 점수를 위해 살아가는 우리의 현 주소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러한 우리의 주어진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들만 생각하려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과에 함께 하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네스다 연못의 뜻을 기억하시며, 그 병자에게 함께 하셨습니다.

시편에서 시편기자는 주님을 [주님은 의로우신 하나님, 사람의 마음 속과 뱃속까지 낱낱이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7장 9절] 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어려움들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어려움을 모르고 계시고, 나의 어려움을 모르고 계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눈에 모이지 않는 과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결과만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결과만이 아닌, 과정과 그 뜻을 다 알고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능력을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힘이 아니라 그 과정과 뜻을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38년 동안 병을 앓고 있던 병자도 은혜의 집이라는 뜻을 기억하면서, 병을 고치려 했을까요? 병을 고치려고 그렇게 연못에 갔지만, 힘이 없어서, 고칠 수 없다는 마음으로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께서 함께 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예수님은 완벽한 결과를 바라시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예수님께 의지하면서, 나아갈 때 그 병을 병자가 고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께 우리의 부족함을 고백하면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부족함을 완성해가는 과정 속에서 예수님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리고, 아직 공부로 바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기 힘들고, 때로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힘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당연합니다. 저도 예배를 드리는 것이 힘들고, 지루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음식이 감사해서 잘 먹겠다는 식사기도도 까먹고, 먹으면서, ‘하나님 맛있는 음식을 주셔서 감사하고, 잘 먹고, 소화 잘 시키겠습니다.’ 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결과를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함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부족한 과정 속에서 자라납니다. 성장 과정 속에서 자신의 어려움을 예수님께 말하면서 그 어려움을 완성하는 파워스톰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려움을 예수님께 말하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그러한 대답들은 어디에 있을까요?

각자, 한 가지씩 예수님께 말하는 것 하나를 생각해 지키는 것을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혼자의 힘이라면 아주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힘이 여러분의 삶 속에 존재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는 기도하는 저 반은기가 되겠습니다.

Posted by 은기
2008. 3. 16. 23:07



민경이가 추천했던 홍대앞에 일공육 라면을 먹으러 갔다.
주말 6시인지라 역시나 줄이 길었다.
1시간 정도 기다려서,
맛있는 식사를 즐겼다.
인테리어는 일본식 배열의 의자에다가 퓨전식 장식이었다.

가장 처음에 야채(양상추, 양파, 무순)과 훈제연어 한조각이 나왔다.
달달한 소스는 별로였지만,
두꺼운 훈제연어 한조각 감질맛 나니 좋았다.

다음에 고추 사킨것과 특이한 것. 태어나서 첨 먹은 숙주나물 피클같은 것이 있었다.
숙주의 이 시큼한 맛이 넘 좋았다. 3번이나 리필해서 먹었다.

무한 리필 식빵, 삶은 계란, 음료수(마운티듀, 콜라, 사이다)은 좋은 서비스였다.

라면은 해물라면, 부대라면이 5000원, 장금이라면이 6000원이다.
라면의 값이 비싸서 어떨까 궁금했다.

그러나 내가 먹은 해물라면의 각종 해물과 숙주나물과 어우러진 맛은 일품이었다.
배가 터질 것 같았으나, 그 많은 라면의 양을 다 먹었다.

아직도 배 터질 것 같다.

민경이의 대접으로 정말 오랫만에 맛있는 것을 먹어서 좋았다.

24시간으로 운영한다니,
언제 이용할 수 있을 기회가 또 있겠지!

Posted by 은기
2008. 3. 14. 16:23



월 : 기독교사상사연구
화 : 영화와 영성
수 : 여성교육개론
금 : virtual faith and future church

기타 등등 이래 저래 한가 할 줄 알았는데,
만만치 않은 이번 학기이다.

감신에서 마지막 학기 최선을 다하여
달려보자.

아자자자.

어느 학기나 읽어야 할 책들이 한 가득이고,
어느 학기나 모자라고, 놀고 싶은 것은 만찬가지인 것 같다.

놀기도 공부하기도 최선을 다해 GO! Go!




Posted by 은기
2008. 3. 11. 09:51





Samuel Rayan, S. J. 저
                          정연복 역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첫째 마당: 소중히 여겨야 할 것

   
 
   
 

땅은 소중하다. 땅은 하나님에게도, 그리고 우리에게도 소중하다. 땅이 소중하다는 것은 성경과 모든 부족민의 전통의 핵심 증언이다. 하나님은 땅의 가치와 경이로움을 제대로 평가한 첫 번째 분이셨다. "하나님께서는 마른 땅을 뭍이라,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 부르셨다. 하나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 1:10).

"이리하여 땅에는 푸른 움이 돋아났다. 낟알을 내는 온갖 풀과 씨 있는 온갖 과일나무가 돋아났다. 하나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 1:12).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만드신 두 큰 빛 가운데서 더 큰 빛은 낮을 다스리게 하시고 작은 빛은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또 별도 만드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빛나는 것들을 하늘 창공에 걸어 놓고 땅을 비추게 하셨다 … 하나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 1:16-18).

"하나님께서는 '바다에는 고기가 생겨 우글거리고 땅 위 하늘 창공 아래에는 새들이 생겨 날아다녀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큰 물고기와 물 속에서 우글거리는 온갖 고기와 날아다니는 온갖 새를 지어내셨다. 하나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 1:20-21).

"하나님께서 '땅은 온갖 동물을 내어라! 온갖 집짐승과 길짐승과 들짐승을 내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온갖 들짐승과 집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길짐승을 만드셨다. 하나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 1:24-25). "이렇게 만드신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 1:31).

땅은 하나님과 우리에게 소중하다. 땅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 땅은 유일무이한 것이요, 땅과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땅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답다. 한 무명의 땅의 연인은 우리를 땅에 대한 명상으로 초대한다: 만약 땅의 직경이 겨우 몇 피트밖에 되지 않는다면, 그래서 들판 어딘가에서 몇 피트 상공을 떠돈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보기 위해 도처에서 몰려올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 주위를 걸어다니면서 그것의 큰 물웅덩이들과 작은 물웅덩이들, 그리고 그 웅덩이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고 놀랄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 위에 있는 돌기들과 그것 안에 있는 구멍들,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매우 얇은 가스층, 그리고 이 가스 위를 떠도는 물을 보고 놀랄 것이다.

사람들은 둥근 공 모양의 표면 위를 이리저리 걸어다니는 모든 것들, 그리고 물 속에 사는 모든 것을 보고 놀랄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더없이 소중하다고 선언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과 같은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또 사람들은 그것이 상하지 않도록 보호하려 할 것이다. 이 둥근 공 모양의 땅은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위대한 경이로움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사방에서 몰려와 그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보면서 마음의 상처를 달래고, 그것에 관한 지식을 얻고, 그것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어떻게 이런 것이 존재할 수 있는지 놀라워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하고 목숨 바쳐 보호하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것이 없이는 그들의 생명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854년 인디언 추장인 시애틀(Seattle)은, 부족민들은 땅을 보고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는 신적인 능력을 물려받았음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이 땅의 모든 부분이 우리 부족민에게는 신성하다. 빛나는 소나무 잎들, 모래가 쌓인 해안, 울창한 숲 속의 모든 안개, 투명하고 콧노래를 부르는 곤충은 우리 부족민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 신성하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 아름다운 땅을 결코 잊지 못한다. 왜냐하면 땅은 아메리카 인디언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땅의 일부분이며 땅은 우리의 일부분이다. 향기로운 꽃은 우리의 자매요 …, 우리 선조들의 재(ashes)는 신성하다. 그들의 무덤은 거룩한 땅이요, 마찬가지로 이 언덕들, 이 나무들, 땅의 이 부분도 우리에게는 신성하다 … 공기는 아메리카 인디언에게 소중하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가 같은 숨을 쉬고 있기 때문이다. 공기는 땅의 정령을 땅이 지지해주는 모든 생명체와 함께 나눈다. 우리의 하나님은 동일한 하나님이다. 이 땅은 그분에게 소중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땅을 경멸하거나, 남용하거나, 낭비하거나, 정복하거나, 약탈하거나, 사유화하거나, 파괴시킬 수 없다. 땅은 우리의 존경과 애정을 받아야할 가치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땅을 건강하고 온전하고 아름다운 상태로 물려주어야 한다. 땅은 그들에게 생명의 근원과 토대가 되어야 한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처럼, 땅은 그들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의 성례전과 기본적인 은총이 되어야 한다.

땅은 하나님께서 인류 및 모든 생물과 함께 나누시는 생명과 사랑의 모든 은총을 요약하는 상징이다. 땅은 사물이나 대상이 아니라 관계적인 현실(relational reality), 즉 마음에서 마음으로 생명과 사랑을 역동적으로 중재하면서 활기 넘치게 생존해 있는 하나의 현실이다.

땅은 빵이나 쌀과 같은 친교요, 모든 존재의 통일성(togetherness)의 경축이다. 그러므로 개인이나 집단은 땅과 땅의 모든 자원을 약탈하고 독점하는 일을 피하고 예방해야 한다. 땅과 땅의 모든 자원은 그 어디에서나 인류에게, 모든 사람에게 공동으로 속하는 것으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 하나님 백성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가능성에 봉사하려는 땅의 자유를 보장하는 한에서만, 기본적인 자원들 그 이상의 것에 대한 분배가 정당화될 수 있다. 땅을 포로로 사로잡고 또 땅이 땅의 배고픈 자녀에게 생명의 우유를 가지고 신속하게 다가서는 것을 가로막는 (땅에 대한) 배타적인 사적 소유권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러므로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은 땅이 몇 사람의 수중에 집중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땅의 본성 및 목적에 어긋나는 불의한 것으로 간주했다. 땅은 언제나 땅 본래의 친교적인 성격을 유지해야 한다 : 하나님과의 친교, 그리고 우리 인간들 사이에서의 거룩한 친교(holy communion). 땅은 언제나 성찬식의 신비를 유지해야 한다. 즉 땅은 이 세계의 생명을 위해 베풀어진 하나님의 빵이요, 하나님의 몸이다. 많은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이 취했던 자세를 우리는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1. 초기 교부들의 토지 소유권에 대한 교리와 가르침의 기초는 인간의 평등이었다. 평등은 다음에서 흘러나온다: (1) 하나님의 마음에 뿌리내리고 있는 우리의 공통된 기원(또한 우리는 땅의 마음과 자궁을 여기에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2) 우리의 공통된 성격(우리 모두는 동일한 기본적 욕구들과 사랑할 수 있는 동일한 힘을 갖고 있다); (3) 우리의 공통된 운명(우리 모두는 하나님 안에서의 삶과 인간 상호간의 삶에로 부름을 받고 있다).

이로써 우리 모두는 창조주의 평등한 허락을 받고 있다. 이 평등한 권리들을 가지고 우리 모두는 공기를 호흡하고, 대지를 걷고, 고귀한 인간 실존에 필요한 땅과 그 밖의 생산적 요소들을 사용한다. 우리는 동일한 역사를 공유한다. 우리는 동일한 대지를 공유한다. 공동의 대지를 사용할 수 있는 우리의 권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권리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평등한 권리에 의해서만 제한된다. 인간의 기본적인 평등은 하나님의 땅이 집중화되고 사유화되는 것을 금지한다.

2. 땅은 이 땅 위에 사는 하나님의 가족 전체를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것이다. 땅은 교부들이 공동의 재화(ta koina)라고 부르는 것, 즉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 예정된 것이다. 땅은 누군가의 노동의 산물(ta idia)이 아니다. 교부들은 공동의 하늘, 공동의 빛, 공동의 우주에 대해 말한다. 그들에게 있어 땅과 공기, 물은 "생명의 근원들"(causes of life)이다. 그 누구도 이 생명의 근원을 박탈할 수 없고, 그 누구도 이 생명의 근원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도록 강요당할 수 없다.

3.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사적인 소유권, 다른 사람을 무소유와 가난한 상태에 머물도록 하는 땅의 집중과 부의 축적은 사기와 강탈, 약탈과 근본적인 불의를 내포한다. 가난한 사람 한복판에서 부자는 도둑놈이다. 재산을 상속하는 것은 훔친 물건을 축적하고 전달하는 것이다. 이 훔친 물건을 다시금 공동체로 복귀시키는 것은 정의의 요구다.

4. 교부들이 정죄하는 것은 사적 소유권의 남용만이 아니다. 그들은 사적 소유권 제도까지를 문제삼는다. 그들은 모든 사유재산을 탐욕, 폭력, 박탈, 약탈, 그리고 도둑질과 동일시한다. 그들에 따르면, 사유재산은 온갖 불화와 갈등,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이 아니라 인간의 법, 황제의 법에 불과하다. 그것은 땅이라는 직물(fabric) 안에 분명히 새겨진 하나님의 목적과 모순된다.

5. 초기 기독교 저술가들은 사적 소유권을 우상숭배로 여겨 배척한다. 사적 소유권은 탐욕을 내포하고 있는데, 바울은 이 탐욕을 우상숭배와 동일시한다. 독점적 권리에 대한 사적 소유권의 주장은 땅과 땅의 온갖 풍요로운 것들에 대해 갖고 계신 오직 하나님만의 절대적 권리에 맞서는 행위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부를 존중하는 한에서만 우상숭배를 피할 수 있다. 진정한 의미의 부는 한 형제요 자매인 우리 모두, 우리의 모든 공동체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땅과 부는 우정과 함께 나누는 생명과 삶의 매개체다.

6. 사도행전 2장과 4장, 또 떡을 떼는 일에 있어 평등의 실천에 대한 본문들(고전 10장, 11장)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초기 교부들이 열렬히 추구했던 것은 그런 충족과 공동체였다.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재화를 공동으로 소유하라는 종교적 명령들이 교회에 출현한 것은, 친구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본래적인 자기이해가 지배계급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질식당하던 때, 그리하여 교회 자체가 로마의 사회적 현실의 모습을 따라 개조되어가던 때였다. 이런 움직임들은 기독교 초기의 공동사회적(communitarian) 비전에 대한 어떤 기억을 지켜가려는, 또 "너희-하나님의 백성들-사이에 가난한 사람이 없도록 하여라"(신 15:4)는 신명기적 권고를 새롭게 인식하려는 시도들이었다. 공동 소유권의 이상은 교회에서 복음적 가치로서 늘 높이 평가받아왔다.

복음적인 것이 많은 사람, 혹은 마을과 도시, 국가와 세계가 아니라 일부 사람에게만 유익한 것으로 공공연하게 주장되는 오늘의 현실에서, 그 이상은 아마도 우리의 신학적·영적 애매모호성을 재는 척도가 될 것이다. 땅은 우리가 우리의 뿌리로 되돌아갈 것을, 그리하여 거기에서부터 하나님과 땅의 새로운 꿈의 공동체를 꽃피울 것을 요구한다. 


둘째 마당: 땅의 상품화, 땅과 인구비율의 전 세계적 불균형, 생태계의 위기

오늘날 땅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있어 세 가지 요인이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이 요인들은 땅과 땅의 신비에 대한 성경적·기독교적 견해와 정면으로 모순된다:

1. 그 어떤 진정한 휴머니즘이나 진정한 종교적 관점에서도, 땅은 그저 우리가 소유하고 처분할 수 있는 하나의 "사물"(a thing)로 간주되거나 취급되지 않을 것이다. 땅은 생명,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에 대한 우리의 예배 및 경험과 너무나도 밀접히 연관되어 있으므로 결코 하나의 상품으로 다루어질 수 없다.

우리는 고대의 부족민 전통에서 여러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태평양 연안의 민족들은, 우리가 땅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땅이 우리를 소유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늘 상기시켜왔다. "나는 여러분이 땅 어머니(Earth Mother)의 힘을 얻기 위해 우리 부족의 거룩한 곳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다 … 우리는 땅을 우리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우리는 그녀를 소유할 수 없다. 그녀가 우리를 소유한다."

땅은 소유물이 아니다. 땅은 사람들이다(land is human beings). 벨록(Hilaire Belloc)은 인간을 "땅의 동물"이라고 정의했다. 땅은 절대로 매매와 가격 흥정의 대상인 시장의 한 상품이 될 수 없다. 땅은 우리의 몸이며 우리 자신, 혹은 우리 어머니의 몸이며 어머니 자신, 혹은 하나님의 성례전(sacraments)이다. 땅은 신성하다. 앞서 인용했던 시애틀 추장의 연설을 더 들어보자:

"워싱턴의 최고 우두머리께서 우리의 땅을 자신이 사기 원한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 어떻게 당신네는 하늘, 또 땅의 따스한 기운을 사거나 팔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생각은 우리에게는 낯설다. 우리가 대기의 신선함과 물의 활기 띤 광채를 소유한 것이 아닐진대, 어떻게 당신들은 그것들을 살 수 있단 말인가? … 우리는 땅의 일부분이며 땅은 우리의 일부분이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영적 깊이와 문화적 세련됨은 이런 정도에까지 이른다. 모든 이민자는 이들의 목소리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는 게 좋을 것이다. "백인은 이해하지 못한다 … 지구는 백인의 형제가 아니라 적이다 … 백인은 땅을 돌보지 않는다 … 백인은 자기 어머니인 땅과 형제인 하늘을 양이나 빛나는 염주알처럼 사고 팔고 약탈해도 좋은 물건인 양 다룬다"는 것이 바로 이들 원주민들의 뼈아픈 체험이다. 백인 대표자들이 인디언의 땅을 양도받는 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왔을 때, 블랙피트 부족의 추장은 이렇게 거절했다:

"우리의 땅은 당신네의 돈보다 더 소중하다 … 햇빛이 빛나고 물이 흐르는 한, 이 땅은 여기에 계속 존재하여 사람과 동물에게 생명을 줄 것이다. 우리는 사람과 동물의 생명을 팔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을 팔 수가 없다. 이 땅은 위대한 영(the Great Spirit)에 의해 우리를 위해 여기에 놓여졌고 우리는 그것을 팔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소가 고개를 끄덕이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당신네의 돈을 세고 또 그 돈을 불태워버릴 수 있다. 그러나 오직 위대한 영만이 이 평원의 무수한 모래알과 풀잎을 셀 수 있다. 당신들에 대한 선물로서, 우리는 당신네가 가질 수 있는, 우리가 갖고 있는 그 어떤 것도 당신들에게 줄 용의가 있다. 그러나 땅만은 절대로 안 된다."

모든 원시사회가 공유하는 이런 세계관에서는, 땅은 하나님의 가족, 우리의 자매와 어머니, 생명과 예배 안에서의 우리의 파트너, 그리고 우리와 더불어 공동의 순례자다. 이 땅을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근본적인 이탈이다. 지파동맹체 시대(tribal period)의 이스라엘의 땅에 대한 견해도 이와 유사했다. 이런 초기의 신념들의 주목할 만한 흔적들이 성경의 최종적인 편집 과정에서도 소중하게 간직되었다. 예를 들어, 땅을 영원히 팔아 넘기는 것은 금지된다. 왜? 그것은 많은 사람의 땅이 몇몇 지주의 손에 집중화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땅은 아주 팔아 넘기는 것이 아니다. 땅은 내 것이요, 너희는 나에게 몸 붙여 사는 식객에 불과하다"(레 25:23).

만약 내 추론이 옳다면, 결론은 이런 식으로 나야 할 것이다: 땅은 절대로 사거나 팔 수 없다. 일단 팔린 땅도 언제든지 되살 수 있었다. 즉 땅의 원래 주인이나 그의 친척들이 돈을 되돌려주면, 땅을 산 사람은 땅을 되돌려주어야 했다. 땅을 산 사람은 땅을 계속 소유할 아무런 권리도 없었다(레 25장; 신 15장). 땅을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시킴으로써 땅을 모독하는 행위는 계급사회의 도래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런 행위는 고대 로마에서 일상적 관행이 되었고, 봉건사회로 전달된 로마의 법은 고대 문화에 대한 식민지 정복의 여러 세기를 거치는 동안 자본주의의 지배적 정신으로서 전 세계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제 땅은 상업적 문화의 노골적인 폭력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성례전으로서의, 그리고 우리의 함께 나누는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본래적인 존엄성을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

2. 땅에 대한 기독교적 전망과 모순되는 두 번째로 중요한 요인은, 지구 표면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분포가 현재 전 세계적으로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을 신학적 문제로 제기하는 티사 발라수리야는 이런 불평등한 분포에서 "세계체제의 주된 결점들과 불의들 중의 하나"를 목격한다. 1500-1950년에 이르는 유럽의 팽창은 사람들이 거주하기에 알맞은 땅들의 대부분을 유럽인이 점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서유럽인들은 북미와 중미, 남미, 호주, 뉴질랜드, 그리고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들을 점령했다. 그들은 중국과 일본, 그리고 태국을 제외한 아시아 전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동유럽의 한 민족인 러시아인들은 태평양과 중국과의 경계선까지 그들의 제국을 넓혔다. 유럽인들은 "지구의 거대한 열린 공간들 중의 대부분"을 제것으로 만들었으며, 유럽과 미국 국민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민족을 영원히 지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하나의 세계체제를 건설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세계는 "백인 민족주의(white-racist) 세계체제"이다.

불균형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전체 인류의 40퍼센트를 구성하는 인도와 중국, 일본의 인구는 지구 표면의 10퍼센트만을 차지하고 있다. 반면에 세계인구의 겨우 1퍼센트를 구성하는 캐나다와 호주와 뉴질랜드는 지구 표면의 13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보다 아주 조금밖에 작지 않은 브라질은 중국 인구의 겨우 10분의 1만을 먹여 살린다. 볼리비아는 일본보다 세 배나 큰데, 일본이 1억 1,500만의 인구를 가진 것과 비교하여 겨우 5백만 인구밖에 안 된다. 뉴질랜드 면적의 겨우 반밖에 되지 않는 방글라데시는 뉴질랜드의 25배나 되는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 북미에서는 땅 대 농업노동자의 비율이 78.4대 1임에 반하여, 아시아와 태평양 연안 국가들에서는 그 비율이 0.98대 1이다. 중국과 다른 중앙 집중화된 경제지역들에서는 그 비율이 훨씬 더 낮아져 0.51대 1이다.

이런 인위적으로 야기된 부당한 불균형에는 인종 차별주의 차원 또한 담겨 있다: 전체 세계체제는 일종의 인종차별주의에 기초한다 … 서로 상이한 인종집단들은 그들이 그 안에서 살아야만 하는 개별적이고 불평등한 "보전자"(preser-ves), 즉 땅을 할당받는다. 황인종은 중국과 일본, 그리고 인접한 섬들을 갖고 있다. 흑인은 아프리카를 갖고 있다.

갈색 인종에게는 인도, 파키스탄, 그리고 동남 아시아가 할당되어 있다. 세계의 나머지 지역들은 주로 백인들 몫이다. 흑인과 황인종, 혹은 갈색 인종이 백인 지역에 자유롭게 이민을 갈 수 있다고는 해도, 그것은 주로 백인을 위한 노예 혹은 값싼 노동자로서 그러할 뿐이었다.

이런 현상은 오늘까지도 계속된다. 호주는 백인이 자기네 땅에 들어와 살도록 광고까지 하며 짐바브웨에서 25만의 백인을 기꺼이 맞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2만5천의 아시아인은 마지못해 받아들이며, 그것도 나름대로 기술과 교육과 재정적 여력이 있는 사람만 받아들인다. "영토가 넓은 그 어느 나라도, 세계인구의 재정착(resettlement)을 기본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인종차별주의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비극적인 사실들은 바로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다. "영토에 비해 인구가 적은 모든 나라들, 즉 미국, 소련, 캐나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호주, 뉴질랜드는 아시아인을 차별대우하는 이민법을 갖고 있다." 이런 전 세계적 불균형과 인구가 적은 나라들의 이민정책은 "인간의 발전과 정의를 가로막는 가장 치명적인 장애물들 중 하나"이다. 따라서 여러 민족에게 땅을 평화롭게 재분배할 수 있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 기본적으로 요구된다.

이것은 세계적인 협의사항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인류의 창조적 성장이 땅의 올바른 사용 및 변형과 관계 맺을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이것은 오염과 쓰레기를 줄일 것이다. 왜? "북미와 호주에 현재 거주하고 있는 자들과는 달리, 제3세계 사람들은 땅을 돌보는 오랜 전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세계발전의 문제들을 다루는 그 어느 국제기구도 문제의 이 측면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지 않다 … 현재의 영토분포는 절대로 손을 댈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땅을 이런 식으로 다루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땅의 자녀들 모두에게 거주할 집을 주고, 또 그들을 알맞고 바르게 양육하고 싶어하는 땅의 소명과 갈망과 같은 근본적인 실제들을 간과하는 것이다.

3. 땅과 자연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 심지어 인간적 관점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세 번째 요인은 생태계의 위기다. 이것은 단순히 기독교적인, 혹은 그 밖의 견해들과 신학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것은 이 지구라고 하는 지극히 작은 행성 위에서의 인간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다. 오늘날 지구는 산업과 농업, 대중매체의 모든 면에 있어 이익 지향적 과학적-기술적 현대문화의 낭비적이고 방탕하고 약탈적인 관행들로 말미암아 오염되고 파괴되어가고 있다. 생명의 집으로서의 지구의 본래적인 위치와 의미와 역사가 죽음의 위협 아래 놓여 있다. 위기의 징후들은 사방에 널려 있다. 소중한 자원들이 무기경쟁, 핵무기 축적, "별들의 전쟁"(Star Wars), 그리고 이와 유사한 미친 짓거리들 같은 파괴적이고 해로운 목적에 헛되이 사용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지구와 지구의 생명을 부분적으로, 전적으로, 혹은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파괴할 수 있으며 또 지금까지 파괴해왔다. 핵 폐기물, 방사능 폐기물, 그리고 그밖에 치명적으로 유독한 폐기물을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바다나 섬, 대륙에 마구 쏟아 붓고 있다. 공장에서 나오는 오염물질 및 이로 말미암은 산성비와 함께, 이것들은 식물과 새, 짐승과 물고기, 호수와 강, 인간에게 대규모의 질병과 죽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독성 연기로 자욱한 대부분의 도시의 대기는 건강과 생명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몇 개의 지명만 거론해보더라도, 쓰리-마일 섬, 비키니 아톨, 보팔과 체르노빌은 우리의 경제적 및 정치적 체제라고 하는 현대의 몰록(Moloch)이 요구하는 인간적 희생물의 상징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그릇 선택한 방향으로 계속 돌진할 때, 땅과 우리에게 어떤 일이 예정되어 있는지 알리는 불길한 경고다.

화학비료와 살충제는 토양을 오염시키고 지력을 떨어뜨린다. 그것들의 과도한 사용은 이 땅과 땅의 생물의 건강에 크나큰 재앙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물은 남용되거나 낭비되고 있으며, 지하수의 근원은 날로 메말라가고 있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 축적과 일회용 소비자중심주의 문화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마구 열대림을 베는 것은 지구 온도 상승, 기상 조건의 급격한 변화, 그리고 오존층 파괴를 야기한다. 이미 이것들은 지구의 울창한 산림과 비옥한 들판을 사막으로 전락시키는 위협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이런 문화체제 안에서, 환경의 파괴는 여러 형태의 사회적 오염들과 병행하여 일어나고 있다. 실업의 증가, 음식과 물 같은 인간의 기본 욕구들을 채우기 위해 엄청난 수의 대중이 몇몇 권력의 중심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 광범위하고 심화된 상품화된 삶의 분위기 속에서 가난한 사람들(특히 여성과 아이들)이 착취당하고 날로 지위가 격하됨, 사람들이 점차적으로 자연과의 조용한 친교로부터 떨어져나가고, 그들의 상호 관계가 약화되며 기계화되고, 시와 신비에 대한 그들의 소박하고 필수적인 감정이 천박한 실용주의나 지나친 탐욕 때문에 메말라질 때 강렬하게 느껴지는 고독감과 무의미성의 고통 등이 대표적인 사회적 오염이다. 가장 큰 오염은, 이제 기계가 땅과 인간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 싱싱한 생명과 창조적인 상상력의 근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결국 기계가 인간을 다스리게 된 것이다. 파괴적인 과학기술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는 인간과 땅의 느리거나 신속한 죽음을 암시해준다.

<땅을 위한 진혼곡>이라는 우리 시대의 시편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생명의 어머니이며 집인 땅을 약탈하고 파괴시키는 광기에 맞서는 날카롭고도 강력한 항의다.

땅이여,
아직 죽은 것은 아니지만
막 숨이 넘어가려고 하는
그대에게 평화 있어라.

여기 한 노래가 있다.
그대와 나의 장례를 위하여
내 가슴속에 휘갈겨 쓴 노래.

독성이 서린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내일 그대의 몸은 차갑고 무감각하게 되리니,
그때에는 아무것도 이 땅에 남지 않으리라.
나 또한 이 땅에 존재하지 못하리라.
그리하여 그대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혹은 그대의 잿빛 얼굴에
한 방울 눈물을 떨구기 위하여,
막 숨이 넘어가려고 하는 그대,
땅을 위하여 내 이 노래를 휘갈겨 쓰노라.
그대는 수없이 많은
비사교적인 자녀들을 낳았지.
그대는 그들이 서로 잡아먹는 것을 보며
남몰래 슬픔의 눈물을 흘렸지.
언제부터인가 그들은
그대를 잡아먹기 시작했지.
그러나 그대, 모든 것을 참아내는 그대는
아무런 저항이나 방해의 몸짓도 하지 않았지.
그대의 품안에서 젖을 빨며
포동포동 살이 오른 그들은
새로운 갈증을 느꼈지.
그대의 신성한 가슴의 피를 빨아먹고픈
그들의 마지막 갈증을.
그들은 태양이 사랑하는 신부에게 입혀준
녹색 옷을 그대에게서 벗겨버렸지.
그대의 여린 살 속으로
그들은 날카로운 손톱자국을 새기고,
그대의 상처에서 용솟음치는
피를 빨아먹었지.
그대 자신의 자녀의 죄와 수치라는
무거운 짐 아래,
약탈당하고 추방당하고
머리가 벗겨지고 등이 굽은 그대.
이제 그대는 우주 속에서
홀로 방황하노라.
땅이여, 아직은 죽지 않았지만
막 숨이 넘어가고 있는 땅이여,
그대에게 평화 있어라.


셋째 마당: 들의 꽃과 하늘의 새를 보라

최근 들어 영적·신학적 작가들은 우리를 회심에로 부르면서 우리가 멈추어 서서 끊임없이 고갈되고 있는 땅과 땅의 충만한 것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재고하고 새롭게 느껴볼 것을 요구해 왔다. 자연에 대한 우리의 무책임한 접근방법은 이제 종말을 고해야 한다. 하나님의 침묵하는 피조물에 대한 전통적인 “정통적 기독교적 오만”은 이제 포기되어야 한다. "땅 자체의 법칙과 요구, 리듬과 한계에 대한 고려 없이 땅을 지배하기 원하는 것은 자연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결핍을 말해주는 명백한 증거이다"라고 말하는 티사 발라수리야의 주장은 참으로 옳다. "땅을 정복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또한 "땅을 돌보아라"고도 말씀하셨다(창 1:28; 2:15).

우리 자신에게서 물질에 대한 모든 비열한 경멸을 제거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존재하게 하는 것에 대해 존경심을 품은 관심을 발전시키는 일은 꼭 필요하다. 자연에 대한 시적(poetic) 접근은 환원주의적인 과학적·기술적 접근과 균형을 이루면서 과학적·기술적 접근의 잘못된 점들을 교정해주어야 한다. 예수의 발자취를 쫓아 꽃을 바라보고 새를 명상하면서 신비와 대면하는 것, 성 프랜시스와 더불어 모든 피조물의 평등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인간, 해와 달, 물과 불을 하나의 무지개 현실(a single rainbow reality)로 통합시키는 자매성을 깨닫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모든 형태의 생명에 담긴 신비와 생명의 담지자로서의 땅의 신비에 대한 느낌도 중요하다. 이 신비는 궁극적인 신비, 즉 모든 실재의 자궁과 결합되어 있다.

이제 우리는 전통적인 저 세상적(other-worldly) 및 이 세상적(inner-worldly) 금욕주의를 넘어 세상을 위하는(pro-worldly) 금욕주의라는 새로운 형태의 금욕주의의 필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이 새로운 형태의 금욕주의는 땅과 사람들, 하나님이 벌이는 흥겨운 "잔치"(conviviality)로 펼쳐진다. 이 잔치에서, 땅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세상적(terrestrial) 가족과 친구들을 위해 차리신 인류 공동의 식탁으로 인식된다. 우리는 경쟁적인 쟁탈전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양육하고 보호하는 즐거운 친교 가운데 이 식탁 주위에 함께 모인다. 이런 잔치는 "땅과 생명에 필수적인 자원들의 불균형한 분배"를 유지시키는, 그리고 "생태계의 섬세한 내적 관계를 파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불의한 사회제도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거절을 요구한다.

만약 땅의 직경이 겨우 몇 피트밖에 안 된다면 …
사람들은 도처에서 몰려와 그 광경을 보고 놀랄 테지 …
사람들은 땅 주위를 걸어다닐 거야 …
사람들은 땅을 사랑하고
목숨 바쳐 땅을 보호할 거야.
왜냐하면, 어떤 식으로든
그들은 알게 될 거니까 …
땅이 없이는,
그들 자신의 활기 또한
존재할 수 없으리란 걸.
만약 땅의 직경이
겨우 몇 피트밖에 안 된다면.


                                                                                                                       

출처 :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399
입력 : 2008년 01월 02일 (수) 12:47:32 당당뉴스

이상적인 이야기일까?
재산과 부의 상징인 토지.
세상에게 이 말이 통할까!
나는 공감하고,
나는 감동받았지만,
나에게 땅이 있다면 공감할 수 있을까?
나에게 공장이 있다면 공감할 수 있을까?
내가 꿈꾸고, 생각하는 것이 파라다이스가 아니였으면 좋겠다.




Posted by 은기
2008. 3. 3. 20:57

경복궁역 7번 출구 육교 주변에 맛집이 몇개 됩니다.
그 중에서 제가 좋아하는 족발집을 소개하려합니다.

족 하나에 20000원에 특유의 겨자 소스와 양파절임과 함께 먹는 맛인 일품입니다.
배달을 통해 접할 수 없는 맛입니다.
구별하지 않고 족발을 좋아하는데,
장충동보다도 더 맛이 좋습니다^^

감자탕도 있는데,
여러명이 간다면,
족발과 감자탕을 함께 즐기는 맛도 좋습니다.

일본인들이 책을 보고 찾아오는 것을 보면,
일본인들의 책에도 실린 것 같아요.
주인분들도 일본어가 가능하신 것 같구요.

야튼 강추입니다. ^^
Posted by 은기
2008. 2. 28. 22:35

간만에 종이 편지를 받았다.
감동적이고, 공감하는 부분이 있어서 옮겨 본다.



교육이란 결국 공동체적 문화 소에서 익어가는 장맛과 같은 것이라 여겨집니다.
.....
한국 사회에서 교육은 두려움과 경쟁과 소외의 진원지이지만 적어도 민들레학교에서는 교육이 기쁨과 함께하는 창조적인 삶임을 경험하게 하고 싶습니다.
....
....
이 모든 교사들이 미래 형성의 주역을 키우는 농부의 마음으로 인내와 열성, 그리고 사랑으로 학생들을 이끌도록 기도해주십시오.
....
....
....
모든 존재의 중심에는 빛이 숨겨져 있습니다. 딱딱한 광물에도, 어두운 우주에도 그리고 인간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도 불멸의 빛이 숨겨져 있습니다.
교육은 이 숨겨진 빛이 비쳐나도록 도전하는 과정입니다. 학교는 결국 빛과 사랑의 세계를 창조하는 공간입니다. 이 빛의 여정에 여러분의 빛을 나누어 주십시오.
.
.
.
.
.
.
.
.
2월 24일 민들레 학교장 김인수

.
.


민들레 학교 2기 신입생 입학식 초청장에 적힌 문구중 공감하는 부분을 옮겨 보았다.
어느새 기독교교육을 늘 고민하는지라 교육에 관하여 공감하는 내용들이 나오면, 기쁘다. 나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마음과 글로나마 나와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 생각은 홀로가 아닌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기쁜 것 같다.
입학식 초청장을 나에게 보내 주셔서 감사했다.
민들레 학교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편지인 것 같다.




Posted by 은기
2008. 2. 24. 00:56

브로콜리 너마저의 노래가 드디어 공중파를 탔다.
드라마 시티를 다 보지 못하여,
곡과 관계는 모르겠으나,
'앵콜요청금지' 에서 숨소리가 편집되어 아쉬웠다.

야튼 동생아!
브로콜리 너마저 여러분!
첫 공중파 축하드립니다.

Posted by 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