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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3. 22. 12:30

[첫 설교] 070625

본문 : 요 5:1-10

목적: 우리는 어떤 예수님을 바라 보고 있는가?

예수님은 베네스다 연못에서 무엇을 하셨는가?

완성의 과정

삶 속에서 우리는 이루어야 할 목표들을 가지고 있고, 그 힘을 기르기 위한 과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하기 싫은 공부와 학교를 다니는 것은 원해서 하기 보다는 어떠한 우리의 무기를 만들고 있는 장소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어떠한 무기들을 만들 수 있는지 성경 본문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고 싶습니다.

성경 말씀에서 살펴 보고자 하는 것은 누가 어떻게 병을 낳았느냐? 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베네스다 연못에서 연못에 들어가지 못한 그 38년 병자를 왜 고치셨는지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의 이야기에서 ‘베네스다’ 라는 연못에서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움직이게 하면,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던지 낳는다고 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물이 움직임을 기다리다가 연못에 앞 다투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38년된 병자는 병이 낳고자 하기를 바랬기 때문에, 그 연못 행각에는 있었습니다. 행각이라 함은 강가 평상 같은 연못가에 쉴 수 있는 공간입니다. 그런데 앞 다투어 들어갈 때, 병자는 움직일 수 없었고, 연못가에 넣어주는 사람들도 없었기 때문에, 그저 연못 만을 바라보면서 누워있었습니다.

병자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우리의 상황 속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다른이 사람들들은 병이 낳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서로 병을 낳기 위하여 자신의 힘을 가지고 달려갑니다. 그러나 그러한 힘조차 갖고 있기 못한 병자에게는 그 목표의 근처에 조차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이 있었나요?

그러면 도대체 ‘베네스다’라는 뜻은 무얼까요?

그럼 어느나라 말일까요?

베네스다라고 써있으니깐 한국말?! ^^

히브리어의 뜻은 ‘은혜의 집’ ‘자비의 집’이라는 뜻을 말합니다. 은혜와 자비라는 말의 뜻은 뭘까요? 그런 집은 어떨까요? 한마디로 아주 정을 주고 받는 집이라는 이미지입니다.

우리도 성경을 읽으면서, ‘베네스다’ 라는 연못은 병을 고칠 수 있는 연못이라는 장소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히브리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충분히 ‘은혜의 집’ ‘자비의 집’이라는 연못의 뜻의 의미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은혜와 자비라는 단어의 뜻을 알았듯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그 의미 보다는 병을 고칠 수 있는 연못이라는 것만을 모두 믿고 그렇게 나왔습니다. 38년 된 병을 고침 받은 사람조차 연못에 병을 고치러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네스다에 연못에 들어간 사람이 아닌, 홀로 연못을 바라보고 실망한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셔서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38년 병을 앓고 있던 사람에게 가셨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은혜가 있는 집과 자비가 있는 집에서는 서로 앞 다투어 병 고치러 들어갈 수 있을까요?

38년이나 병상에 누워 외로운 삶을 보내고 있는 사람을 홀로 두고, 움직일 수 있는 자신만, 혹은 내 가족과 내 친한 친구만을 연못에 넣어 줄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은혜의 집’ ‘자비의 집’ 이라는 뜻을 기억하시며, 그 병자에게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병을 낳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자비의 집이라는 그 뜻을 기억하시면서, 그렇게 베네스다 연못을 바라 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베네스다 연못을 어떻게 보았나요? 병만 고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앞 다투어 그 연못에 들어갔습니다.

우리 파워스톰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베네스다 연못, 즉 은혜와 자비가 넘치는 삶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 왜? 베네스다의 연못에 누워있는 38년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마음만가지고 예수님을 생각만 하더라도, 병을 고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홀로 외로이 있다고 하더라도, 학교에서 집에서 몸을 움직일 힘조차 없고, 자신의 목표도 막상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시험이라는 일주일의 기간을 위해 그 점수를 위해 살아가는 우리의 현 주소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러한 우리의 주어진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들만 생각하려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과에 함께 하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네스다 연못의 뜻을 기억하시며, 그 병자에게 함께 하셨습니다.

시편에서 시편기자는 주님을 [주님은 의로우신 하나님, 사람의 마음 속과 뱃속까지 낱낱이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7장 9절] 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어려움들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어려움을 모르고 계시고, 나의 어려움을 모르고 계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눈에 모이지 않는 과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결과만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결과만이 아닌, 과정과 그 뜻을 다 알고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능력을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힘이 아니라 그 과정과 뜻을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38년 동안 병을 앓고 있던 병자도 은혜의 집이라는 뜻을 기억하면서, 병을 고치려 했을까요? 병을 고치려고 그렇게 연못에 갔지만, 힘이 없어서, 고칠 수 없다는 마음으로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께서 함께 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예수님은 완벽한 결과를 바라시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예수님께 의지하면서, 나아갈 때 그 병을 병자가 고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께 우리의 부족함을 고백하면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부족함을 완성해가는 과정 속에서 예수님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리고, 아직 공부로 바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기 힘들고, 때로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힘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당연합니다. 저도 예배를 드리는 것이 힘들고, 지루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음식이 감사해서 잘 먹겠다는 식사기도도 까먹고, 먹으면서, ‘하나님 맛있는 음식을 주셔서 감사하고, 잘 먹고, 소화 잘 시키겠습니다.’ 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결과를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함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부족한 과정 속에서 자라납니다. 성장 과정 속에서 자신의 어려움을 예수님께 말하면서 그 어려움을 완성하는 파워스톰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려움을 예수님께 말하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그러한 대답들은 어디에 있을까요?

각자, 한 가지씩 예수님께 말하는 것 하나를 생각해 지키는 것을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혼자의 힘이라면 아주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힘이 여러분의 삶 속에 존재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는 기도하는 저 반은기가 되겠습니다.

Posted by 은기